[청사초롱-이건용] 쏠림

입력 2011-04-18 17:50


“포퓰리즘보다 그것이 먹히는 사회의 미성숙이 더 문제다. 그 바탕에 쏠림이 있다”

여러 음식점에서 하나를 골라야 할 때 우리는 손님이 북적거리는 집을 찾는다. 아내의 지론인데 ‘그런 집이어야 유통이 좋아서 신선한 재료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집은 처음 어떻게 해서 북적거리게 되었는가? 그것은 모른다. 모르는 채 여러 소머리국밥집, 아귀찜집, 조개구이집 중에 유독 한 집에만 사람이 몰리고 다른 집은 파리를 날리는 쏠림이 생긴다. 장사가 안 되는 집의 입장에서는 속상한 일이다.

영화의 경우도 그렇다. 사람들이 많이 든 영화가 사람을 모은다. 어떤 영화는 아예 ‘500만 돌파를 앞두고 있으니 여러분도 참여해 달라’는 식으로 선전을 한다. 영화를 선택하는 다른 기준이 없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많이 보았으니 재미있겠지’ 하는 기대로 이러한 선전을 따라간다. 하기야 ‘친구따라 강남간다’는 속담도 있다.

쏠림이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 일 중의 하나가 2002년 월드컵 당시 서울시청 앞을 메웠던 붉은 인파일 것이다. 16강전이 벌어질 때 나는 ‘이것이 마지막 인파일 수 있겠다’ 싶어 광화문으로 나갔었다. 경기를 보는 데에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조건이었다. 저 멀리 있는 화면에서는 공의 행방이 잘 보이지도 않았고 수시로 앞의 사람이 일어나서 시야를 가렸다. 맥주도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나 했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에, 함께 함성을 지른다는 사실에, 스스로 그 일부가 되어 있는 무리의 막대한 규모에, 그 규모가 주는 힘과 열기에. 그 경기가 극적인 승리로 끝나자 열기는 광기에 가깝게 되었고 그 이후 두 번 더 이 인파는 시청과 광화문 일대를 덮었다. 그때마다 두 배, 세 배 커지면서.

쏠림은 힘이 될 수 있다. 전쟁을 하는 경우에는 이것이 사활적으로 필요하다. 또 우리가 약한 존재일 경우 이렇게 해서 큰 힘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래서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는 표어가 필요했고 그 힘으로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경제발전과 정치발전을 동시에 이룬 세계 10위권 국가로 커왔다.

쏠림은 위험하기도 하다. 열기는 쉽게 광기가 되고 그것이 잘못 분출되면 파시즘과 전쟁으로까지 연결될 수 있다. 그렇게 극단으로 치닫지 않는다 하더라도 쏠림은 문화를 빈곤하게 한다. 문화는 백가지 꽃이 제각기 아름다움을 다투는 상태여야 풍부해진다. 어느 한 입맛이 지배하거나 한 음식점만 잘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별종들과 이단아들이 있어야 하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면서 자신의 세계를 쌓아가는 변두리 예술가들이 있어야 한다. 또 강자에 대한 용감한 비판자들과 아직 오지 않은 세상을 내다보는 외로운 선지자도 소중하다.

쏠림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언론은 본래 ‘쏠림’적이다. 자질구레한 기사가 아무리 많아봐야 소용없다. 메가톤급 이슈가 필요하다. 그래서 될 만한 이슈는 키운다. 화끈하게 추어올리거나 무자비하게 물어뜯는다. 다행히 여론을 선도할 때는 특종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뒤늦은 용비어천가를 부르거나 죽은 시체를 뜯어먹는 하이에나가 되기 십상이다.

정치인들도 쏠림을 좋아한다. 백 사람이 백 가지 꿈을 꾸고 있으면 표를 모으기 힘들다. 하나나 둘의 강력한 이슈가 있어야 외치기도 쉽다. 그러나 그런 이슈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인기를 끌 수 있는 정책을 내세운다. 요즘 자주 문제로 지적되는 포퓰리즘이 이래서 나온다. 실제로 행정수도, 신국제공항, 과학단지 등 선심성 공약의 후유증 때문에 나라가 앓고 있기도 하다. 포퓰리즘도 문제지만 이것이 먹히는 사회의 미성숙이 더 문제다. 그리고 그 바탕에 쏠림이 있다.

쏠림은 비판을 싫어한다. 내부 고발자를 미워한다. 그러다 보니 말이 안 되는 정책이 그대로 공약으로 나온다. 쏠림은 여러 가지 다른 의견들의 돌출을 반가워하지 않는다. ‘좋은 게 좋은 거지’가 모든 것을 덮는다. 그렇게 해서 남는 ‘좋은 것’이란 결국 집단 이기심밖에 없다. 포퓰리즘은 여기에 호소한다. 집단 이기심에 일단 적중하면 쏠림의 성향은 그 정치인에게 표를 몰아준다. 소위 정치인들이 좋아하는 ‘바람’이 부는 것이다. 쏠림을 졸업할 때가 된 것 같다.

이건용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