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찬영 (11) 캄보디아서 ‘SOS’… 기쁘게 23일간 집회 인도
입력 2011-04-17 17:59
한국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가 방콕에 있다는 소식이 외부에 전해지면서 하루는 캄보디아에서 초청장이 왔다. 미국 선교단체인 ‘C&MA(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에서 전보를 보낸 것이다.
‘SOS 최찬영 선교사님, 2주일 내로 캄보디아로 와서 일주일간 특별집회를 인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시 캄보디아 선교는 가톨릭 선교사들과 C&MA 교단이 주로 담당하고 있었다. 긴급 구조를 요청하는 ‘SOS’라는 용어까지 사용하면서 집회를 요청하니 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내 여권으로는 캄보디아에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발급받은 여권에는 목적지가 태국 한 나라로 기재돼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나라 여권법상 태국에 있는 것만 가능하고 다른 나라에는 갈 수 없었다. 1주일 가까이 고민하던 중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태국 영주권을 갖고 있으면 태국에서 해외여행을 위한 신원보증서만으로 캄보디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담당자를 찾아갔다.
“캄보디아에 가기 위해 신원보증서를 발급받으러 왔습니다.”
“영주권을 보여주십시오.”
“여기 있습니다. 제가 급한데 언제쯤 신원보증서를 받을 수 있을까요?”
“2주일 정도 걸립니다.”
특별집회까지는 1주일밖에 없는데 2주일이나 걸린다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담당자에게 급한 사정 이야기를 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노력해 보겠습니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온 뒤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서류를 접수시킨 지 5일째 되는 날, 담당자가 집에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태국 정부에서 발행한 신원보증서가 들려 있었다.
나는 요청받은 날짜 안에 캄보디아 프놈펜에 도착할 수 있게 됐다. 한국에서 온 동양인 선교사가 집회를 인도한다고 했기 때문인지 현지인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당시 나는 태국어 설교는 자유로웠지만 영어로 설교하는 게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프놈펜 집회를 마친 뒤 캄보다의 6개 지역을 방문하며 23일간 집회를 인도했다. 특히 크라체에 갈 때는 칸퐁참에서 작은 배를 타고 11시간 항해해야만 했다. 그곳에서는 영어 태국어 중국어 등 어느 말도 통하지 않았다. 만국 공용어인 ‘보디랭귀지’를 섞어가며 의사소통을 해야만 했다. 마침 톰슨이라는 미국인 선교사를 만났고 그가 특별집회를 인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크라체에서 만난 톰슨 선교사 부부는 훗날 베트남에서 사역하다가 월맹군의 대대적인 공격에 순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으로 귀한 선교사였기에 매우 안타까웠다.
2007년 크리스마스를 맞아 다시 캄보디아를 방문했다.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때 ‘킬링필드’였던 곳이 복음의 옥토가 돼 있었다. 현지 정부에서 해외 선교사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한국인 선교사들이 다양한 활동을 하며 새로운 선교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어 마음이 든든했다.
나는 태국 현지교회 목사로 시무하면서 기독교병원의 원목, 성경학교 교사 등으로 활동했다. 태국어를 잘하는 선교사로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서 집회 요청이 이어졌다. 태국 교단의 부탁으로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학교를 순회하며 전국 집회를 하게 됐다. 한번은 C&MA에서 동북쪽 곤켄에 세운 일반 학교와 한센병 환자를 위한 학교에서 일주일간 특별집회를 인도하게 됐다.
정리=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