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룡 고려대 교수 비평집 ‘번역의 유령들’… “원문 베껴쓰기 의미 전달 안돼”

입력 2011-04-15 17:30

“모국어의 잠재적 가능성을 일깨우는 유령이 바로 번역이다. 그리하여 정확한 제 자리를 타국어에 돌려주는 유령도 바로 번역이다.”

조재룡 교수(고려대 불문과·사진)의 비평집 ‘번역의 유령들’(문학과지성사)은 번역 문학이란 말은 오래도록 횡행했으되 정작 번역의 정체성, 번역 자체에 대한 성찰적 모색이라 할 ‘번역학’ 연구가 척박한 우리 문학토양에서 매우 의미 있는 보고서다. 그는 “번역은 타자의 가치라는, 실로 헤아리기 어려운 것을 꼼꼼히 따져보라는 권고에 가깝기에 필연적으로 이타성의 문제를 제기한다”며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이타성이라는, 이 모험적 성격의 개념이 우리의 사고 깊숙이 내려앉아 어느 틈엔가 의식에서 출몰하는 무의식적 형식이 되어가는 것도 바로 번역을 통해서다.”(126쪽)

전통적으로 성실한 번역가란 원문을 그대로 옮겨오는 직역자였다. 그러나 조 교수는 “원문을 그대로 옮겨오는 번역이 가능한가하는 물음 앞에 우리가 되레 묻게 되는 것은 오히려 번역가의 창조성과 그것이 뻗댈 언저리이다”라고 강조한다. 출발어(작가의 모국어)를 기계적으로 베끼는 일에 급급한 원문중심주의 번역가들은 의미 전달에 실패하고 만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프랑스의 시학이론가인 앙리 메쇼닉을 인용하고 있다.

“단지 번역가일 뿐인 번역가는 번역가가 아니며, 그는 소개자일 뿐이다. 작가만이 번역가이다. 번역행위가 전적으로 제 글쓰기이거나, 번역행위가 하나의 역작(작품)에 통합될 때, 번역가는 ‘창작’의 이상화가 목도할 수 없었던 ‘창작자’이다.”(140쪽)

예컨대 김지영이 번역한 ‘엄마를 부탁해’의 영문판 ‘Please Look After Mom’은 이미 신경숙이 쓴 ‘엄마를 부탁해’는 아닌 것이다. 김지영은 이미 직역과 의역의 경계를 허물고 자신만의 고유하고도 창조적인 번역을 해냈기 때문이다. 좋은 번역 작품에는 번역자의 목소리가 담겨 있는 것이다. 조 교수는 ”의미나 뜻을 번역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논리 속에는 소위 직역이라고 하는 행위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이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자칫 이율배반처럼 보일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창조적인 번역가’라는 말이 오히려 번역가의 고유한 권리이자 번역의 승패를 좌우할 번역가의 덕목이 된다는 것이다.

“뛰어난 번역가를 한번 보라. 이들은 모두 다시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문을 비켜나갔다고 말할 수 없는 그런 글들이 유령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최초에 언어적 모험이었던 타자의 숨결을 번역에서 보장하는 길은 번역가가 제 목소리에 그것을 담아내는 방법뿐이다.”(142쪽)

다시 말하면 모국어의 감옥을 깨뜨리지 않고서 번역은 없다. 조 교수는 여기서 바벨을 끄집어낸다. “바벨의 후예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담의 언어를 복원하려는 야심이 아니라, 중심이 붕괴되어 산재하는 언어들 간의 친화력을 살펴보는 것이다. 빗대어 말하자면 출발어와 도착어(번역자의 모국어)라고 상정한 두 개의 원을 서로 어긋나게 포개어볼 때, 중첩되는 부분을 제외한 보름달 모양의 양쪽이 어떻게 서로를 간섭하는가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바로 번역인 것이다.”(146쪽)

번역은 이렇게 세상과 거래를 튼다. 나를 보여주지 않으면 나도 남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