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시네필(cinephile·영화 애호가)’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서울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은 천국이다. 각종 고전 DVD 대여는 물론 웬만한 영화관보다 훨씬 큰 상영관에서 항상 무언가를 상영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프로그램은 ‘만추’ 특별전. 이만희 감독이 연출한 원작은 소실됐지만 김수용·김기영·김태용 감독의 리메이크 작품이 상영되고 있다. 지난해 10월엔 ‘임권택 감독 전작전’, 지난달엔 ‘청춘영화 특별전’이 화제를 모았다. 4∼5월에는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 특별전’과 ‘발굴, 복원 그리고 초기영화로의 초대’ 등이 예정돼 있다. 모두 놓치기 아까운 프로그램들인데 이처럼 영화팬들의 등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듯한 프로그래밍은 대체 누가 하는 걸까.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한국영화 기획전을 담당하는 모은영(41) 프로그래머를 14일 만났다.
“작은 영화제를 매달 여는 느낌이에요. 연간 상영 편수를 합치면 300∼400편이나 되거든요. 저희 인원이 많진 않지만 좋아하는 일이니 즐겁게 일하고 있어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기획전을 담당하는 프로그래머는 모 프로그래머를 포함해 2명. 모 프로그래머가 한국 영화, 오성지 프로그래머가 해외영화 관련 기획을 맡고 있다. 매달 아이디어를 내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세계와 한국의 영화사뿐 아니라 현재의 트렌드에도 민감해야 기획전이 성공할 수 있기 때문. 그는 “‘만추’ 기획전 같은 경우 김태용 감독님이 영화를 만들 때부터 1년 이상 준비했다. 김 감독님의 리메이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기획전이었다”고 말했다.
모 프로그래머는 서른 살이던 1999년 EBS의 영화프로그램 ‘시네마 천국’ 작가로 활동하면서 영화 업무를 본격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제가 봤던 영화들을 묶어서 한 카테고리로 글을 쓰는 일을 했었지요. 예를 들면 ‘영화 속의 물의 이미지’ 하는 식으로요. 그때의 경험이 지금도 도움이 되고 있어요.”
방송작가 일을 끝낸 다음에는 본격적인 영화 공부를 시작했고, 평론가·영화제 프로그래머 등의 일을 했다. 영상자료원과는 2007년 객원연구원이 되면서 인연을 맺었다.
한국영상자료원의 주요 사업은 소실된 옛 영화들을 발굴·복원하고 보존하는 것이다. 때문에 해외영화 상영이나 2000년대 작품들까지 포함된 기획전 상영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목소리도 있다고 한다. “‘고전’이라고 하면 60∼70년대 영화를 먼저 떠올리는 경향이 있어요. 영상자료원은 그 경계를 확대하는 역할을 하는 거지요. 아직은 자료원 외부에서도 내부에서도 선입견이 있는 것 같아요.”
비정기적이던 영상자료원 기획전은 2008년부터 매달 새로운 작품을 제공하는 정기 상영으로 바뀌었다. 그는 “‘언제 오더라도 영화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기 때문에 업무는 많다”고 했다. 영상자료원을 찾는 관객은 한 해 6만명선. 무료 상영을 원칙으로 하는 비영리사업이지만 실적 압박도 상당하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일에 대한 확신은 뚜렷하다. 모 프로그래머는 기획전 상영을 ‘역사의 현재화’라고 힘주어 말했다.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영화감독들 중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영화’로 한국 영화를 드는 분이 거의 없어요. 한국 영화의 어느 시기가 단절돼 있는 거지요. 하지만 정말 영화가 없는 건 아닐 거예요. 제가 하는 일은 단절돼 있는 역사를 연결하는 작업입니다. ‘한국영화에도 이런 역사들이 있었다’고 알리는 거지요.”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
모은영 한국영상자료원프로그래머 “기획전 상영은 역사의 현재화… 매달 작은 영화제 여는 느낌”
입력 2011-04-15 2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