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찬영 (10) 가난한 나라 한국 선교사라고 온갖 멸시

입력 2011-04-14 17:38

“어느 나라에서 오셨습니까?”

“어디서 온 것 같습니까? 한번 맞혀 보시지요.”

“일본, 대만, 홍콩, 중국?”

“아니오.”

“그럼 어디입니까? 도무지 알 수 없군요.”

“저희는 하늘나라 시민입니다. 세계 시민입니다.”

“아니, 그런 대답이 어디 있어요.”

“한국에서 왔습니다. 한국에서 온 선교사입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당시 태국인들은 코가 큰 서양 사람들이나 선교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폐허 속의 가난한 나라에서 온 선교사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우리 부부를 선교사로 인정해 주거나 대접해 주지 않았다. 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외국 선교사들에게 존칭어 ‘아쟌’을 넣어 부른다. 그런데 태국인들은 우리 부부에게 그런 존칭을 붙여주지 않았다. 일반 사람에게 붙이는 ‘쿤’이라는 존칭조차 붙여주지 않았다.

한번은 푸레라는 지방으로 태국 총회의 렉 타이용 총무와 함께 교회 및 학교사역을 돌아보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태국에 도착한 지 7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아 언어가 서툴 때였다. 렉 타이용 총무는 방콕 기독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반 직장에서 일하다가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이었다. 당시 태국에서는 신학교를 졸업하지 않아도 쓸 만한 사람이다 싶으면 안수를 해주곤 했다. 그는 외국 선교사들에게는 아주 친절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푸레까지는 상당한 거리라 기차의 침대칸을 이용했다. 아래층 침대는 옆에 창문이 있고 통풍이 잘되었기 때문에 60바트(약 3달러) 정도 하고 위층 침대는 불편하고 통풍이 잘되지 않아 40바트(약 2달러) 정도를 내야 했다. 타이용 총무는 기차표 2장을 사왔다. 그리고 나와는 한마디 상의 없이 이렇게 말했다.

“초이(최)! 저 위층 침대에 올라가시오.”

명령조의 어투가 신경에 거슬렸다. 갑자기 서러움이 밀려왔다. ‘저 사람은 왜 나를 이렇게 대접할까? 내가 미국에서 온 선교사였어도 이랬을까?’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고 괄시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잠이 오지 않았다.

마음이 상했지만 목적지에 도착한 뒤 그와 사역지를 자세히 돌아봤다. 그리고 돌아오던 길에 또다시 황당한 경우를 겪었다. 장마철이라 비가 많이 내렸다. 이 때문에 철로가 붕괴돼 더 이상 기차를 탈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어 차를 타고 되돌아가야 했다. 새벽 2시경 우리는 강을 건너야 했다. 차에서 내려 걸어서 작은 통나무 다리를 건넜다. 우산으로 간신히 빗줄기를 피하며 조심스럽게 다리를 건넜다. 맞은편에서 다른 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데 타이용 총무가 나를 불렀다.

“초이! 내가 시골 마을에서 선물로 받은 빗자루를 강 건너에다 깜빡 놓고 왔어요.”

“그래서요.”

“당장 가서 가져와요!”

그는 몸종 부리듯 나에게 명령했다.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엇이 올라왔다. 울화가 치밀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강을 건너가서 빗자루를 가져왔다. 오가는 길에 비를 맞으며 눈물을 쏟았다.

‘이 사람은 나를 종으로 대하는구나. 선교사나 목사를 호칭하는 아쟌은커녕 일반 사람을 존칭하는 쿤이라는 호칭도 쓰지 않고 함부로 대하는군.’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교사 파송예배 때 들은 말씀이 떠올랐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최초의 선교사다. 그분은 천국을 버리고 우리에게 오셨다.” 인간을 섬기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묵상했다.



정리=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