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의 영성운동
초대교회 박해가 끝나면서 교회가 세속화되자 이를 막기 위하여 강한 수도원적 금욕적 영성운동이 시작되었다. 사막의 은둔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잘 들을 수 있고, 일상의 세속생활을 떠나야 더욱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도원적 영성운동은 4단계로 발전하여 갔다.
제1단계는 교회 안에서의 금욕주의 운동이다. 이 시기에는 예수의 재림이 속히 다가오리라는 파루시아적 신앙이 강하였기 때문에 주님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더욱 철저한 금욕적 영성운동을 갈망하였다. 이것은 니케아 회의 이전에 일어난 것으로 평신도보다는 성직자들 속에서 많이 일어났다. 그래서 이러한 성직자들을 반수도사(half monk)라고도 부른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오리겐(Origen)이다. 그는 성욕을 자제하기 위하여 스스로 거세하였다.
제2단계는 은둔적, 개인적 금욕주의 운동(Anchoretism)이다. 이것은 4세기 초에 일어난 운동으로, 엘라야와 모세를 모델로 삼았다. 그래서 작은 셔츠나 야생짐승의 가죽을 입었다. 음식은 빵과 소금이었으며, 동굴이 집이었다. 기도와 명상과 찬양에 힘쓰고 사탄과 싸우는 것을 영적 투쟁으로 생각하였다. 동방교회에서는 많이 행하여졌다. 대표적인 인물은 성 안토니(AD 250∼356년)로 105세를 살았다. 90년 간 샘물과 나무 밑에서 명상하고 사색하였다. 고등학문, 문학, 그리고 과학 등을 경멸하였고, 성경공부에만 몰입하였다. 300에이커의 땅을 팔아 여동생의 경제적 지원을 위해 남겨둔 것 이외에는 모두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하였다. 일주일에 2∼5일 금식하고, 하루 한 끼만 그것도 빵과 소금과 물만 먹었다. 포도주와 육식은 절대 안 먹었다. 그는 죽는 날까지 눈이 건강하여서 잘 보였고, 치아도 건강하였으며, 성화의 핵심요소인 겸손과 단순성을 유지하였다.
제3단계는 은둔적 공동생활 운동(Coenobitism Cloister)으로 수도원 운동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성 파코미우스(AD 292∼379년)는 동지를 모아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농업, 배 짓기, 바구니 만들기 등을 영성훈련과 함께 실천하였고,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돕기도 하였다. 8∼9개의 수도원을 만들었는데 그가 죽은 후 100년 뒤에는 5만개로 늘어났다.
제4단계는 수도회 조직 운동이다. 본격적으로 서방교회 수도원 운동을 개척한 사람은 성 베네딕트였다. 몬테 카시노에 수도원을 설립하여(AD 529년) 수도원과 교회의 거리감을 조정하였고, 합리적 금욕주의 생활규칙을 제정하였다. 베네딕트는 깊은 명상기도를 통하여 많은 영적 체험을 하였고, 그것을 동료들의 수도원 영성훈련의 원칙으로 삼았다.
초대교회 수도원 운동의 교훈을 몇 가지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순수한 사도적 생활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가난, 동정, 순종으로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그의 제자가 되길 열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완전 성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동방교회의 신학 전통에 따라 신화 곧 신성에의 참여(벧후 1:4), 하나님과의 연합과 교제를 강조하였다. 마지막으로 지속적 영성훈련을 강조하는 것이다. 기도, 독경, 명상, 금식 등으로 영적 기쁨과 자유를 체험하였다. 특히 성화를 위한 명상기도, 관상기도, 예수기도 등은 현대교회가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이다. 태제명상기도나 교회사 속에서 나타난 명상과 관상기도를 한국 개신교의 인격적 성화훈련을 위해 배워야 한다.
김홍기 총장 (감리교신학대학교)
[평신도 신학강좌] 교회의 역사
입력 2011-04-14 17: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