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의 씨네마 부산-PIFF 15년의 기록 (14)] 이용관씨, 갈비뼈 부러지도록 골프 연습

입력 2011-04-14 18:06

일본 남단 오키나와 섬에서 국제영화제가 개최됐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 미군의 상륙작전으로 초토화됐던 ‘비극의 땅’에서 ‘웃음과 평화’를 주제로 열리는 이 영화제는 세계 유일의 코미디영화제일 겁니다. 중앙정부나 현(縣)정부 지원 없이 요시모토흥업이 일부 민간 협찬을 받아 주최합니다. 때문에 미증유의 대지진 재앙에도 지난달 영화제가 열렸습니다. 정부 지원을 받았다면 아마 열리지 못했을 겁니다. 국민들에게 코미디로 위안과 용기를 주겠다는 히토시 오사키 사장의 결단에 자선 모금행사를 곁들여 검소하게 마련된 것이죠.

영화제를 운영하자면 많은 자금이 필요합니다.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지원, 기업 및 개인의 협찬은 필수적입니다. 세계 정상인 칸영화제도 소요 예산 2000만 유로 중 1000만 유로는 정부 지원으로, 나머지는 협찬과 자체 수입으로 충당합니다. 1800만 유로로 운영하는 베를린영화제, 1100만 유로의 베니스영화제나 로마영화제도 50% 이상 정부 지원을 받습니다.

‘예산 투쟁’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예산은 100억원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59억원은 부산시에서, 15억원은 정부에서 지원 받았고 나머지 26억원은 협찬으로 충당했습니다. 해외 다른 영화제에 비하면 정부 예산의 비중은 너무나 작습니다. 그런데도 국고지원을 받는 것은 곡예하듯, 절벽 타듯, 위태롭고 험난했습니다.

정부 지원은 생각도 할 수 없었던 1회 영화제가 끝나고 저는 정부 예산 따내는 데 주력했습니다. 신규예산 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문화체육부, 재정경제부, 국회 심의를 거쳐 1998년도(3회) 예산에 7억원의 국고보조를 타냈습니다. 마지막 단계에서 고교 동문인 임창열 부총리의 힘이 컸습니다. 99년도 정부 지원은 10억원으로 늘었습니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계수조정 마지막 날 자정, 부산 출신 김진재 예결위원장을 만나 3억원을 증액할 수 있었습니다.

2000년 여름, 첫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기획예산처가 영화제 지원은 3회에 한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이를 고집했습니다. 저는 지연을 동원해 강원도 출신인 당시 이수원 과장과 최종찬 차관 도움으로 10억원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듬해에는 기획예산처가 모든 영화제 지원을 동결하려 했고 부천의 김홍준, 전주의 최민, 서울여성영화제의 이혜경 위원장은 제가 나서주기만 바랐습니다. 전윤철 장관을 비롯해 차관, 예산실장, 담당 국장을 차례로 만나 전년 수준의 국고보조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2006년부터 예산 제도가 바뀌었습니다. 모든 영화제의 국비지원 예산을 일괄 편성한 뒤 매년 문화관광부의 영화제 평가에 따라 가감해서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선택과 집중’을 하겠다는 취지였고, 총액은 42억원뿐이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예산 당국이나 국회를 상대로 ‘예산투쟁’을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10억원이던 정부 지원은 영화제 평가로 3억원이 증액돼 2006년 13억원이 됐고 2007년 14억원, 2008년 15억원, 2009년 18억원으로 늘었습니다.

MB 정부가 들어선 뒤 문화계에 ‘좌파논쟁’이 불붙었습니다. 각종 영화제들이 좌파세력으로 지목됐고, ‘폭력단체’로 분류(경찰청)되기도 했습니다. 일정액 이상 국고지원을 받은 곳은 감사원 특별감사를 받았고, 좌파로 간주된 ‘독립영화’는 정부나 영화진흥위원회 지원이 없어졌거나 축소됐습니다.

부산영화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노무현 정권에서 영화진흥위원회의 부산 이전이 결정됐는데, 부산영화제가 그 ‘주범’이라는 부당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각종 영화제 국고지원 총액도 42억원에서 35억원으로 줄었습니다. 감액된 7억원 중 3억원은 부산영화제 예산에서, 나머지 3억원은 전주영화제 예산에서 삭감됐습니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일까요. 전주는 전년도 10주년 사업비 추가 지원액 3억원을 삭감한 것이었기에 부산영화제만 3억원 줄어든 셈이죠. 올해 영화제 예산은 국고지원을 아예 없애고 ‘영화발전기금’에서 지원토록 변경됐습니다. 빨간불이 켜진 것이죠.

스폰서의 흥망성쇠

정부에 비해 부산시 지원은 안정적이고 적극적이었습니다. 제1회 영화제 소요예산 22억원 중 부산시 지원은 3억원. 나머지 19억원은 입장료수입 4억원, 민간협찬 15억원으로 충당했습니다. 첫해 영화제가 성공하면서 시 지원은 5억원으로 늘었습니다. 해마다 증액 요청을 했지만 2000년까지 4년간 동결됐습니다. 영화제 ‘광팬’이던 문정수 시장은 행정 지원엔 적극적이었으나 재정 지원에는 소극적이었습니다.

98년 7월 취임한 안상영 시장은 해운항만청장일 때 저하고는 테니스 동호인 사이였습니다. 시의 지원 예산은 비로소 6회(2001) 7억원, 7회(2002) 10억원, 8회(2003) 12억원으로 해마다 증가했습니다. 안상영 시장은 불행히도 2004년 2월 4일 타계했고, 보궐선거로 허남식 시장이 부임했습니다.

영화제 규모의 확대와 정비례해 시의 지원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습니다. 9회(2004년) 13억원, 10회 18억원, 11회 28억원, 12회 30억원, 13회 32억원, 14회 56억4000만원이 됐습니다.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기업 협찬은 매우 불안정하고 한시적입니다. 영화제 주 스폰서의 잦은 변동이 이를 입증합니다. 첫해의 주 스폰서는 3억원을 지원한 대우개발 정희자 회장이었습니다. 제 고교 동창인 김우중 회장의 부인이죠. 2회 3억원, 3회 2억원을 협찬했던 대우개발은 세 번의 지원으로 그쳤습니다. 제2회 주 스폰서에 3억원을 협찬한 SK텔레콤이 합류했습니다. ‘센텀시티’ 개발에 참여하려다 중단하면서 1회 지원으로 끝났습니다. 99년은 IMF사태 여파로 협찬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대영시네마와 부산극장이 영화제에서 받은 임대료를 다시 영화제에 조건부 기부해 각각 1억원과 7000만원을 협찬했습니다.

2001년부터 영화계의 지원이 시작됐습니다. 첫 단추는 강우석 감독이 끼웠습니다. 시네마서비스가 매년 1억원을 협찬하기 시작했고, 해운대의 멀티플렉스극장을 사용하면서 CJ엔터테인먼트, CJ CGV, 쇼박스 미디어플렉스, 롯데시네마 등이 협찬 행렬에 동참했습니다.

5회(2000) 때는 3억원을 협찬한 KTB네트워크가 메인 스폰서였습니다. 고교 동문인 하성근 이사의 주선으로 4월 권성문 회장을 만났습니다. 확신이 서지 않던 권 회장은 5월 칸영화제 개막식에 저와 함께 참석한 뒤 귀국하자마자 3억원을 협찬했습니다. KTB네트워크의 경영이 악화된 뒤론 피에스타RDS가 주 스폰서가 됐습니다. 역시 2002년 5월 피에스타 전부옥 사장을 칸영화제에 안내했고, 2002년과 2003년에 각각 4억원을 지원 받았습니다. 2004년 영화제 직전 피에스타가 파산해 영화제 운영이 큰 차질을 빚기도 했습니다.

2005년 NHN(네이버), 2006년 제일모직(빈폴)을 비롯해 LG전자 신세계백화점 부산은행 기아자동차 등 많은 후원기관이 있었기에 오늘의 부산영화제가 있습니다. 2007년부터는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은 이용관 위원장이 스폰서 유치 업무를 전담하고 있습니다. 이 위원장은 낚시광입니다. 그런데 2008년 영화제가 끝난 뒤 STX 임원진에게서 “3개월 내에 골프 타수 120을 깨면 스폰서가 되겠다”는 제의를 받고 갈비뼈 3개가 부러질 정도로 연습해 지금 골프 마니아가 됐습니다.

영화제가 정부 지원을 받는 한 ‘감독과 간섭’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산 확보는 집행위원장의 최대 과제이며 책무이자 역량이기도 합니다. 지원은 받되 간섭에서 벗어나는 일 또한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