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원자력발전소 사고에 따른 방사능 공포로 천일염 사재기가 연일 도를 넘고 있습니다. 10년 먹을 분량의 소금을 미리 주문하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11일 전남 신안군 증도면 태평염전으로 가는 차 안. 라디오에선 같은 내용의 뉴스가 매시간 반복됐다. 서울을 출발한 지 5시간30분이 지날 무렵, 전남 신안군에 속한 섬 지도와 증도를 연결해주는 증도대교를 건너며 수차례 전화했지만 먹통이었다. 대여섯 차례 통화 시도를 계속한 후에야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친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소금 찾는 전화가 이어져서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네요. 죄송합니다.”
천일염, 뭐기에
정구술(51) 증동리교회 집사는 국내 최대 염전인 태평염전의 염전관리차장이다. 어렵게 만난 그와 함께 염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에 함께 올랐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실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바다를 인접한 528만㎡(160만평) 땅엔 직사각형 모양의 소금밭 수백 개가 바둑판처럼 펼쳐져 있었다.
왜 이곳의 소금이 지금 그렇게 인기를 끄는 걸까.
소금은 크게 천일염과 정제염으로 나뉜다. 정제염이 바닷물을 전기분해해 불순물, 중금속을 제거하고 얻어낸 염화나트륨(NaCl)의 결정체인 반면, 천일염은 바닷물을 염전으로 끌어들여 바람과 햇빛으로 수분만 증발시켜 만든, 자연 소금이다.
이곳 태평염전에서는 천일염을 만든다. 신안군은 국내 천일염 생산량의 65%, 국내 염전 면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이곳 천일염의 품질은 세계적으로 뛰어나다.
“소금은 바다에 녹아 있는 풍부한 미네랄을 담고 있는 결정체입니다. 미네랄은 직간접적으로 생명현상에 관여하죠. 소금을 먹는 건 몸에 좋은 미네랄 덩어리를 섭취하는 겁니다. 생명유지를 위한 필수적인 활동이죠. 소금으로 인체의 미네랄 균형도 유지할 수 있어요.”
일본 원전사고, 그리고 소금
그는 염전에서 일한 지 26년이 됐다고 했다. 천일염을 찾는 전화가 이리도 많이 온 건 처음이란다. 정신이 없다고 했다. 2007년 태안기름유출사건이 터졌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그와 함께 찾아간 목재 소금창고엔 소금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1∼3년 묵은 천일염은 이미 바닥이 났고 4월초 생산을 시작한 햇소금마저 동이 났다.
일반적으로 4인 가족이 1년에 먹는 천일염의 양은 20㎏들이 1포대 정도. 최근엔 최대 20포대를 주문하는 사람들도 부쩍 늘었다. 가격도 올랐다. 정씨는 50%에서 최대 100%까지 소금 값이 크게 올랐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수요 증가는 지난달 11일 동일본 대지진으로 발생한 일본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를 기점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일본 정부는 원전 사고 후 방사능 피폭 위험에 노출된 일본 국민에게 방호약제로 요오드화칼륨을 복용하도록 권고했다. 이 같은 요오드성분은 원전에서 나올 수 있는 방사성물질인 ‘요오드 131’이 갑상선에 농축되는 것을 방지한다. 요오드 131은 갑상선에 농축돼 갑상선암, 후두암을 유발할 수 있다.
천일염엔 요오드성분이 함유돼 있다. 신안 지역에서 생산되는 천일염은 미네랄과 요오드성분 함량이 풍부하다고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다. 수요가 늘고 있는 이유다.
정씨는 태평염전에서 나는 천일염의 품질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며 엄지를 치켜 올렸다.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소금 가운데 미네랄이 함유된 소금은 1%에 불과합니다.
우리 천일염과 프랑스 게랑드(Guerande) 염전에서 나는 천일염이 세계 상위 1% 소금에 해당되는 거죠. 우리 소금의 미네랄 함유량은 게랑드 염전의 소금보다 2∼3배 많을 정도입니다. 맛도 더 좋고요.”
증도 토박이의 평생 친구
정씨는 평생을 함께 해온 천일염에 대한 수요가 커지는 것을 보며 “가족 하나가 갑자기 유명해진 듯한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친동생이 어느 날 갑자기 스타가 돼 유명인사가 된 것 같아요. 그동안 고생하더니 이제야 사람들이 알아봐주는구나…. 기특한 게 사실입니다.”
증도 토박이. 그는 증도에서 태어나 지금껏 그곳에서 소금과 함께 살고 있다. 그의 할아버지는 개인염전을 운영했다. 어린 시절, 염전은 놀이터였다.
“놀이터라는 게 따로 없었어요. 염전에 가서 뛰어놀고 수차(발로 밟아 물을 퍼올리는 재래식 기구) 위에서 놀고…. 소금창고에서 숨바꼭질도 하고요. 그보다 재밌는 건 없었죠. 어렸을 때부터 소금도 참 많이 먹었어요.”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조그만 비닐봉투 하나를 내보였다. 소금이었다. 정씨는 음식점에 가서 밥을 먹을 때도 천일염만 먹는다.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음식에 소금을 뿌려 먹는다. 밥에도, 반찬에도, 소금을 엄지와 검지로 조금 집어 뿌려 먹으면 모든 음식이 산해진미로 바뀐다는 게 그의 얘기다.
소금 맛이 거기서 거기 아니냐고 묻자 목소리가 높아졌다. “같은 소금이 아니라니까요.” 그는 소금 양치도 하루에 네 번씩 한다. 가끔 웃을 때 드러나는 치아가 하얗게 빛났다.
모태신앙인 정씨는 염전에서 소금을 만들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수차례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 염전에서 놀고 있던 저를 잡고 여러 번 강조하셨어요. 하나님 말씀에도 나오는 소금, 정말 소중한 거라고. 꼭 커서 소금 같은 소중한 사람이 되라고 말이죠. 소금 같은 사람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소금을 만지고 있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소금은 정씨에게 단 한 번의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을 속이지 않고 정성을 들여 일한, 딱 그만큼의 품질을 갖춘 소금을 얻는다. ‘오늘은 너무 힘드니까 하루만 쉬자’는 식으로 일할 때 소금은 제 맛을 내지 못했다. 그걸 깨달은 뒤부터 그는 매일매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소금을 만들었다.
염전은 크게 저수지, 증발지, 결정지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바닷물은 저수지에서 수로를 통해 증발지로 옮겨지고 증발지에서 햇빛과 바람을 통해 자연 농축된다. 농축된 소금물(함수)은 결정지에서 소금 결정체로 만들어 채염(採鹽)된다. 그런데 자연에 맡겨 두면 소금이 저절로 만들어질까. 정씨는 절대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얻는 곳이 염전이라 했어요. 증도 염전은 기계의 사용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손은 가장 중요한 도구죠. 정성이 들어간 만큼 좋은 소금이 얻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할 것 투성이
“햇빛, 바람, 좋은 땅, 바닷물 등이 조화를 이뤄야 최고의 소금을 얻어낼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이곳에 너무나 좋은 조건을 허락해 주셨어요.”
증도 주민 10명 중 9명은 크리스천. 증도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님께 감사할 것 투성이”라고 입을 모았다. 실제로 찬양과 기도 소리를 수시로 들을 수 있었다. 첫 천일염이 얻어지는 4월초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드리는 ‘첫 소금 봉헌예배’는 마을의 꽤나 큰 행사다.
“고사…. 그런 거 안 하죠. 저희는 첫 소금 봉헌예배 올리는 것으로 한 해 소금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요. 성경에 소금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오잖아요. 그 구절 함께 읽고 통성으로 기도하죠. 올 한 해 우리 마을에서 나오는 소금을 위해, 그 소금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우리 자신을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올해 첫 소금 봉헌예배가 12일 태평염전에서 올려졌다. 사람들이 모여 풍년을 기도했다. 예배 막바지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 국민들, 태평소금 먹고 일본 방사능이 와도 거뜬하게 이겨내고 건강하게 해주십시오. 아멘!” 한바탕 웃음이 쏟아졌다.
신안=글 조국현 기자·사진 서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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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4-13 1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