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성기철] 총리에게 갈등해소 업무 맡겨라

입력 2011-04-13 17:40

“청와대가 나서는 게 효율성은 있겠지만 정치적 오해 받을 수 있다”

기자 초년병 시절, 그러니까 노태우 정부 때 총리실 고위 간부로부터 들은 얘기다. “청와대로부터 ‘범죄와의 전쟁’ 범정부 대책을 수립해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고 관계부처별 대책을 종합해 보고서를 올렸어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청와대에서 관계부처로부터 별도 보고를 받아 대책을 마련했답니다. 우린 헛수고한 셈이지요. 대통령제 국가에선 국무총리가 필요 없어요.”

총리실 간부의 신세타령을 들으면서 대통령과 총리, 대통령실(당시는 대통령 비서실)과 총리실의 관계 설정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겠구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새롭다. 사실 정부 수립 이후 총리가 행정부 2인자로서의 권한을 제대로 행사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 허수아비 총리, 대독(代讀) 총리였다.

김황식 현 총리도 그런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까. 동남권 신공항 및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입지 선정과 LH(한국토지주택공사) 지방 이전 등을 놓고 사회·정치적으로 엄청난 갈등을 겪고 있음에도 총리실이 적극적으로 뛰는 모습이 안 보인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그럴듯한 대책회의 한번 했다는 소릴 듣지 못했다. 각종 현안 해결과 관련해 이명박 대통령이 김 총리에게 힘을 실어주는 듯했지만 잘 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다.

반면 청와대가 전면에 나선 형국이다. 신공항 백지화를 결정한 후 이 대통령은 대구시장과 경북지사, 부산시장을 차례로 만나 위무했다. TK(대구·경북) 출신인 권재진 청와대 민정수석과 김두우 기획관리실장은 TK지역을, 부산 출신의 박형준 대통령 사회특보는 부산을 방문해 정부 결정의 불가피성을 설명하며 토라진 민심을 달랬다. 임태희 대통령실장은 기자들과 만나 과학벨트의 양대 핵심 시설을 분리하지 않되 나머지 시설은 다른 지역에 분산 배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대통령이, 청와대가 이런 식으로 계속 전면에 나설 작정인가. 국가 주요정책을 조정, 결정하고 지역 간, 계층 간 갈등 사안을 해결하는 데 효율성만 따지자면 총리실이 청와대를 따라갈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의 생각과 청와대 입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와대가 매사 개입하는 데는 위험이 뒤따른다. 어떤 정책 결정에 청와대가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생각될 경우 ‘정치적 판단’을 했다는 오해를 하기 십상이다. 만에 하나 그 결정이 잘못된 것으로 드러날 경우 대통령이 국민들로부터 직접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곧바로 레임덕(임기 말 권력누수)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해보는 소리다. 총리실을 활용하라는 것이다. 청와대 입장에서 보면 총리실이 못 미더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총리실의 역량 발휘 여부는 청와대가 힘을 실어주기 나름이다. 우리나라 헌법이 규정한 총리의 권한은 막강하다.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하게 돼 있다(헌법 제86조 2항). 특히 사회적 위험·갈등 관리는 총리실의 핵심 임무다(정부조직법 제18조 1항).

우리 헌정사에서 총리실이 역량을 충분히 발휘한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대중 정부 때 김종필 총리와 노무현 정부 때 이해찬 총리는 행정각부를 제대로 통할했다. 김 총리는 김 대통령과 이른바 공동정부를 운영했고, 이 총리는 책임총리란 이름을 얻었다. 총리가 소신껏 일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비교적 성공적이었다는 평을 들었다. 대통령이 헌법 정신에 따라 작심하고 총리에게 권한을 위임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김황식 총리는 대권 같은 데 관심이 없는, 비정치적인 인물이다. 총리직을 국민에게 봉사하는 마지막 기회로 생각하고 있지 않나 싶다. 사심이 없기 때문에 그에게 대임(大任)을 맡겨도 하등 문제가 없다고 본다. 정책조정 및 갈등해소 역량을 상당 정도 갖췄다는 게 중평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통령에게 방탄(防彈)을 자임할 정도의 충성심도 있어 보인다. 그런 총리를 왜 적극 활용하지 않는가.

성기철 카피리더 kcs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