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정승훈] 과학벨트, 원칙 되새겨야

입력 2011-04-13 17:40

기자가 “과학비즈니스벨트의 입지는 어느 곳이 되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시 “기초과학의 학제(學際) 간 연구가 중요하다. 요즘엔 기초과학도 분야가 세부적으로 나뉘어 연구가 진행되기 때문에 학문 간의 융합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이 대통령은 “종합적인 연구가 가능한 곳을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며 “대덕연구단지 등이 후보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2006년 11월 9일, 당시만 해도 유력한 대권주자 중 한 사람이었던 이 대통령이 일본의 쓰쿠바 과학도시를 방문한 자리에서 한 얘기다.

이 대통령은 그때 과학비즈니스벨트의 후보지를 명확하게 지명하지 않았다. 대덕연구단지를 거명하긴 했지만 잠재적 후보도시의 하나로 예를 든 것일 뿐 확정적인 발언은 아니었다. 다만 뚜렷한 원칙은 제시했다. 학제 간 연구, 학문 간 융합이 가능한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수 과학자들이 꿈꿔 왔던 과학비즈니스벨트의 모습이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기 훨씬 전부터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를 중요한 공약의 하나로 염두에 뒀다. 이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기 전 두 번 외국 순방길에 나섰는데 첫 번째는 유럽이었고, 두 번째는 일본이었다. 유력한 차기 주자였던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쫓기 위해 기자들도 동행했다.

유럽 방문의 핵심은 ‘한반도 대운하 사업’의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운하를 둘러보는 일정 외에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유럽핵입자물리학연구소(CERN)와 독일 GSI연구소 방문 등의 일정도 소화했다. 당시 이 대통령은 “성장의 동력을 기초 과학으로 확대해야 할 때가 왔다”며 과학비즈니스벨트 건설을 강조했다.

일본 방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도쿄대에서 강연을 하고 주요 정치인을 만나는 빠듯한 일정 중에도 쓰쿠바 과학도시를 방문했다. 250여개의 공공·산업체 연구소가 집중돼 있는 이곳에서 그는 ‘고에너지 가속기연구소’에 특별한 관심을 표시했다. 과학비즈니스벨트 구상의 핵심이 중이온가속기가 설치될 기초과학연구원이었기 때문이다.

임기 전 주된 관심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과학비즈니스벨트 추진은 이 대통령 취임 후 본격화되지 못하고 삐거덕거리기만 했다. 과학비즈니스벨트 종합계획을 수립하고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특별법’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세종시 문제와 얽히면서 통과가 계속 늦춰졌다. 2년 가까이 국회에서 잠자고 있던 법은 지난해 12월에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구성된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위원회는 지난 7일 첫 회의를 개최한 데 이어 13일 2차 회의를 열고 중이온가속기와 기초과학연구원 본원을 통합 배치한다는 원칙을 발표했다. 과학계가 오래 전부터 숙원했고, 대통령이 후보가 되기 전부터 구상했던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사업이 이제야 가시화되고 있는 셈이다.

어렵사리 법을 통과시키고 사업 추진을 본 궤도에 올리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앞으로도 해결해야 할 과제는 산적해 있다. 앞서 신공항 건설을 둘러싼 논란에서 보듯 당장 입지 선정을 놓고 험난한 이전투구가 예상된다. 지자체와 야당은 저마다 특정 지역 유치가 절대선인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여당 지도부 내에서도 대통령의 인품 문제를 거론하는 등 입지 선정을 둘러싼 논란이 극한까지 치닫는 모양새다.

정치권은 들썩이고 있지만 해법은 정치에 있지 않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입지가 선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과학비즈니스벨트를 구상했던 당시를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 대통령이 4년 5개월여 전 얘기했던, 기초과학의 학제 간 연구 및 학문 간 융합이라는 원칙과 다수 과학자들의 입지에 대한 생각이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무엇을 위해서, 왜 과학비즈니스벨트를 조성하고자 했는지를 숙고한다면 입지 선정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정승훈 특집기획부 차장 s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