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출판] “다 잘될거야” 외줄 인생 발등 찍는 ‘맹목적 긍정’ 그 음로론의 실체… ‘긍정의 배신’

입력 2011-04-12 17:35

긍정의 배신/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부키

‘긍정적’이란 단어를 경계하거나 삐딱한 눈으로 보아야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긍정적 태도에 대한 찬미가 산업 현장과 경제, 정치, 종교, 학계에까지 깊게 뿌리를 내려 일종의 신념 체계를 형성하고, 관습과 생활 태도에 깊은 영향을 준다면 그것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긍정의 배신’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긍정의 신념 체계에 ‘삐딱한’ 시선을 들이댄 책이다. 책에서 말하는 긍정주의는 ‘맹목적인 긍정’ 또는 ‘병적인 낙관론’처럼 부정적인 의미를 담은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밝은 면만 보고, 너 자신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라’는 긍정주의의 메시지가 불편한 사회 현실을 외면하고 저마다 자신의 쳇바퀴 돌리기에만 열중하게 만든다는 것을 지적했다.

돌아보면 위기의 대부분은 사전 경고를 묵살한 대가였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도 오래 전부터 경고음이 울렸지만 무시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구제역 확산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정부의 늑장 대응으로 피해를 키웠다. 저자는 병적인 낙관론이 위기의 징후에 눈감게 만들어 금융위기를 비롯한 사회적 재앙에 대비하는 힘을 약화시켰다고 지적한다. 더욱 가혹한 것은 사회적 실패의 책임을 개인의 긍정성 부족으로 돌림으로써 시장경제의 잔인함을 변호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긍정에 대해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의심을 품기 시작한 것은 유방암 진단을 받고부터이다. 환자를 돕는다는 명목 하에 벌어지는 각종 긍정 운동의 산업 규모가 엄청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저자는 유방암과 싸우면서 미국 문화에 깊이 스며든 긍정주의의 횡포에 눈을 떴다. 부정적인 태도가 암의 원인이라며 유방암을 선물로 여기라고 몰아붙이는 긍정주의 슬로건이 환자들을 자책감에 시달리게 만드는 부작용을 체험했다는 것이다.

긍정이라는 가치가 어떻게 신자유주의와 소비 자본주의의 전도사가 되었는지, 긍정의 매트릭스가 사회 곳곳에 얼마나 그물망처럼 촘촘히 퍼졌는지, 저자의 예리한 시선을 따라가 보자.

건국 당시 미국을 지배한 종교 이념은 금욕과 가혹한 자기성찰을 요구하는 칼뱅주의였다. 1860년대 칼뱅주의에 반발한 일단의 종교인들이 긍정주의의 뿌리라 할 ‘신사상 운동’을 태동시킨다. 신사상은 칼뱅주의에 짓눌렸던 미국인의 마음의 병에 탁월한 효력을 발휘하며 성장했다.

20세기 초 이 사상의 조류는 ‘성공과 부의 촉진’이라는 신선한 영역을 찾아내면서 종교적 이념에서 사회적 이데올로기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중반 이후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긍정적 사고가 요구되는 직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경제적 토대에 조응한 상부구조로서 긍정주의의 활약은 비단 기업에만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신복음주의로 번창하는 초대형 교회들이 그 바통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고 말한다.

“2001년부터 2006년 사이에 주간 예배 참석자 수가 2000명 이상인 초대형 교회의 수는 배로 증가해 1210개에 달했고, 총신도 수는 약 440만 명에 이르렀다. 초대형 교회의 새로운 긍정신학은 고난과 구원에 관한 참혹한 이야기나 가차 없는 심판을 접어 두고 현생에서의, 그것도 아주 빠른 시간 안에 가능한 부와 성공과 건강을 약속한다.”

저자는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자기계발서의 암시들, 하나님의 이름으로 단지 네가 원하는 것을 한껏 추구하기만 하면 된다는 초대형 교회들의 설교, 이익을 위해 수시로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뒤숭숭해진 분위기를 동기 유발 강사들과 라이프 코칭으로 수습하는 기업들 간에 이루어지는 모종의 커넥션을 발견해낸다. 또 저자는 끌어당김의 법칙을 퍼뜨린 베스트셀러 ‘시크릿’의 맹점, 낙관주의의 어두운 뿌리, 기업에 파고든 동기유발산업 등을 비판하고 대책 없는 긍정보다는 아무리 작은 행동이라도 현실의 위험을 제거하려는 시도가 행복의 비결이라고 말한다.

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