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의 대상을 직시하라
마귀와 대치하고 있는 세상 속에서 기독교인들이 긴장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너희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엡 6:10)라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지려면 적을 아는 것이 우선이다. 나 혼자 아무리 강해도 적을 모르면 소용없다.
강건해진다는 것은 마귀가 어떻게 역사하는지, 어떻게 나의 믿음을 타락시키는지, 어떻게 내 신앙생활을 방해하는지, 어떻게 영적 생활을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지 철저하게 알고 이긴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마귀의 역사 자체를 취급하지 않으려는 것도 마귀의 역사에 놀아나고 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에덴동산부터 강력하게 마귀의 역사를 언급하고 있다. 최초의 인간을 죽인 자가 바로 마귀이다. 앞으로 인간을 죽일 자도 마귀이다. 끝까지 인간을 죄 짓게 해서 망하게 할 작자도 마귀인 것이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라고 했다. 혈과 육의 싸움을 이겨야 그 다음 공중의 정사와 권세를 잡은 마귀와의 싸움을 시작할 수 있다. 마귀는 “너, 나와 싸우자” 이렇게 멱살 잡고 힘으로 싸움을 걸어오지 않는다. 마귀는 먼저 우리의 생각을 철저히 속이기 때문에 싸워 보지도 못하고 망한다. 영적 생활에서 적은 무조건 우리를 죽이려고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귀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망했듯이 우리도 그와 같이 망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단 한시라도 경계를 늦출 수 없다. 설교를 들어도 감동이 없고, 충격이 없다면 그것은 적에 대한 경계를 늦춰서 그렇다.
‘왜 설교를 듣는데도 감동이 없나? 왜 설교를 들어도 내 속에서 터져 나오는 애절함이 없나? 그렇게 살지 못하고도 왜 후회와 통곡이 없나?’ 영적으로 마비되어서 그런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깨어 근신하라고 하셨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마귀는 이 세상 안에 있는 모든 환경, 그리고 우리의 육신의 소욕, 정욕까지 총동원해서 우리를 영원히 멸망할 자로 만들기 위해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다. 또 택한 자라도 미혹할 수만 있으면 미혹하려 찾고 있다.
마귀의 역사는 지구 안에 있는 모든 환경을 총동원하고 우리 육신의 소욕까지 미혹하고 유혹해가면서 우리를 죄의 인간으로, 저주의 인간으로 변질시켜 지옥으로 끌고 가려 한다. 이렇게 마귀는 우리를 장악하고 지배하려 하는데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미워할 것 다 미워하고, 성질부릴 것 다 부리고, 욕할 것 다 하고, 싸울 것 다 싸우고, 할 말 다 하면서 교회만 형식적으로 다니고 있다면 너무 비참하지 않을까?
영적 전투에서 승리라는 말은 자기를 보호하는 일에 성공했다는 말이다. 그저 운동경기처럼 져도 그만, 이겨도 그만이 아니다. 지면 반드시 영적인 대가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대가는 우리가 감당할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철저하게 마귀를 이겨야 한다. 믿음을 강건하게 하자. 하나님 말씀으로 철저히 무장해 마귀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하자. 그래서 승리하는 믿음 생활을 해야 한다. 십자가 군병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할렐루야!
윤석전 목사 (연세중앙교회)
[평신도 신학강좌] 파도치는 영성
입력 2011-04-12 17: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