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찬영 (8) 선교사 여권 발급에 1년이나 걸리던 시대

입력 2011-04-12 20:41

1955년 4월 24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선교부장인 한경직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영락교회에서 선교사 파송예배를 드린 우리 부부는 출국 준비를 서둘렀다. 하지만 처음부터 난관에 직면했다. 총회 선교부원 중 어떻게 해야 여권을 받을 수 있고, 어떻게 비자 수속을 밟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도 선교 목적의 여권을 발급하는 게 처음이었다. 나 또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 여권을 발급하는 일이 교육부 소관인지, 내무부 소관인지, 문화부 소관인지, 공보부 소관인지 도무지 몰랐던 것이다. 할 수 없이 직접 각 부처를 찾아다니며 알아봐야 했다.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 여권을 발급 받으려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예에? 선교사라고요? 선교사 여권이라… 그게 우리 부처 소관입니까?”

“어느 부처 소관인지부터 알아봐야겠기에 찾아왔는데요.”

“아마 교육부로 가야 할 겁니다.” “아니, 문화부로 가야겠는데요.” “공보부에 문의해보시죠.” “내무부에서 신원증명을 먼저 받으셔야 합니다.” “경찰국에 가 봐야 합니다.” “외무부로 가야지요.”

각 부처 담당자들도 처음 있는 일이라 어디 소관인지, 누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오히려 도움을 청하러 온 나에게 묻곤 했다. 결국 교육부 문화부 공보부 내무부 외무부 등을 돌면서 아주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서류 하나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전달되는 데 몇 주일에서 몇 달씩 걸리기도 했다. 누군가 나에게 일을 맡은 담당자에게 뇌물을 주지 않으면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고 귀띔까지 해 주었다. 뇌물을 줘서라도 일을 빨리 진행시키라고 권한 것이다.

‘주의 복음을 들고 가는 선교사가 시작부터 뇌물을 줘가면서 일하는 게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 마냥 기다리고 앉아 있을 수만도 없지 않은가? 그럴 수는 없다.’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처음부터 인간적인 방법으로 일한다면 선교지에 가서 무엇을 전하고 어떤 모범을 보여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바른 방법으로 하자.’

나는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처럼 매일 담당자를 찾아다녔다.

“이 서류가 언제 될 수 있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

“그럼 내일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장담할 수 없습니다.”

경찰에 신원조회를 신청했으나 두 달 반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나는 담당자를 찾아갔다. 그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이것저것 물으면서 시간을 끌었다. 뭔가 달라는 눈치였다. 나 같은 숙맥의 눈에도 많이 해 본 솜씨 같아 보였다. 나는 못 가면 못 갔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절대 뇌물을 줄 수 없었다.

지인들과 교인들은 이런 사정을 모르고 만날 때마다 언제 떠나느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선교사 임명받으신 지 언젠데…”라는 말이 되돌아오곤 했다. 나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 인내를 배웠다. 8개월이 지난 뒤에야 신원조회가 끝났다. 외무부에서 여권을 발급받는 데만 2개월이 더 걸렸다. 서류작업을 시작한 지 만 일년이 지나서야 여권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선교사로 외국에 나가 고생한 것이 아니라 떠나기 전에 국내에서 1년여 마음고생을 한 셈이다. 우리 부부는 한국과 외교관계도 확실하지 않고 대사관도 없는 태국을 향해 마침내 떠나게 됐다. 파송예배를 드린 지 1년하고도 한 달이 지난 뒤였다. 1956년 5월 24일, 1주일에 한 번씩 운행하는 홍콩행 프로펠러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정리=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