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염성덕] 한국의 케말 파샤를 고대하며
입력 2011-04-11 17:38
지난달 방문한 터키 곳곳에서 대형 초상을 보았다. 눈썹은 짙고, 눈동자는 부리부리하고, 콧날은 우뚝하고, 입술은 굳게 다문 중년의 남자였다. 관공서 외벽은 물론 간혹 유적지 복원 현장에서도 초상을 볼 수 있었다. 성지순례차 터키를 찾은 증산제일교회 한 성도가 가이드에게 물었다.
“저 남자는 누구죠. 초상이 곳곳에 있는데.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맹목적으로 떠받드는 북한을 연상시키네요. 그런데 터키가 폐쇄적인 나라는 아니잖아요.” “터키 초대 대통령을 지낸 무스타파 케말 파샤입니다. 그는 세종대왕, 김좌진 장군, 이승만 대통령에 비유할 수 있는 위인입니다.”
가이드는 케말의 치적을 늘어놓았지만 그가 성지순례객들의 흥미를 돋우려고 농담하는 것만 같았다. 비교 대상 인물들이 동시대에 살았던 것도 아니고, 세종대왕(1397∼1450)과 이승만(1875∼1965) 초대 대통령 사이에는 엄청난 역사적 간극이 있지 않은가.
개혁과제 완수한 국민 영웅
귀국해서 ‘이스탄불’(존 프릴리·민음사) 등 터키 역사서와 백과사전을 확인해 보니 가이드가 케말의 업적을 확대·과장한 것은 아니었다. 잘 알다시피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왕이 아닌가. 케말도 1928년 8월 어려운 아랍 문자 대신 쉬운 라틴 문자를 터키어로 표기하도록 법을 만들었던 것이다. 가이드는 “이 조치 덕분에 터키인들의 문맹률이 뚝 떨어졌다”고 말했다.
김좌진 장군은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했고, 1920년 청산리대첩을 이끈 독립투사의 아이콘인데 케말도 비슷한 역정을 거쳤다. 몰락 직전의 오스만제국을 향해 열강의 침략과 주변 속국들의 분리 독립투쟁이 빈발하자 군인이었던 케말은 영토를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이승만과 케말은 양국의 초대 대통령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전 대통령이 부정선거를 자행하다 4·19혁명으로 실각한 반면 케말은 터키 역사에 혁혁한 공적을 남겼다. 몇 가지만 간추려 보자. 정교분리, 태양력 채택, 이슬람 교단 폐쇄, 신비주의적 의식 금지, 시대정신에 뒤떨어진 오스만 법률 체계와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 대신 스위스 민법 채택, 일부다처제 불법화, 여성 참정권 도입…. 무슬림이 압도적으로 많은 터키에서 불가능할 것 같은 개혁과제들을 관철시켰다. 위대한 정치인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떤가. 선거 때마다 공약(空約)을 남발하고, 경제성이 없는 사업에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붓고, 지역이기주의로 국가사업의 발목을 잡고, 국민보다는 지역 주민 이익을 앞세우고, 국익 차원에서 공약 이행을 포기하면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십자포화를 쏘아대고 있지 않은가.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고 백년대계를 준비하는 정치인은 보이지 않고, 소탐대실하는 정치인만 수두룩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다시 케말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간경화 말기 진단을 받은 그가 1938년 11월 10일 서거했을 때 터키인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그의 시신은 이스탄불의 모든 주민들이 찾아와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할 때까지 돌마바흐체 궁전에 안치됐다가 앙카라로 옮겨져 매장됐으며 터키 온 국민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이스탄불·440쪽)
우리도 하루빨리 보고 싶다
케말 사후 군사 쿠데타가 두 차례 일어났고, 1990년대에 집권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케말의 개혁 과제 일부를 후퇴시키기는 했다. 하지만 그가 국민의 곁을 떠난 지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터키 국민은 케말의 애국애족 정신과 자세를 잊지 않고 있다. 주유소 직원, 대형 마트 점원, 관광상품점 주인, 버스 기사 등 터키에서 만난 서민들은 대개 “케말을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 지도자를 둔 ‘형제의 나라’ 터키 국민이 부러웠다. 우리나라에서도 당대는 물론 상당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국민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위대한 지도자를 보고 싶다.
염성덕 논설위원 sdyu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