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찬영 (7) 꿈같은 美유학 앞두고 선교사로 가라니…

입력 2011-04-11 17:42


1954년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장학생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학교에서 생활비와 용돈도 제공하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의사인 아내는 로스앤젤레스 카이저기념병원에서 수련의를 할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중 풀러신학교 초대총장이신 오렝카 박사에게 또 다른 감동의 편지가 왔다. 아내가 풀러신학교와 가까운 패서디나에 있는 헌팅턴메모리얼병원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안광국 목사님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총회 부탁으로 우리를 만나러 오셨다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최찬영 목사님, 지금 총회 선교부에서 해방 후 처음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려 합니다. 여러 사람과 상의한 끝에 몇 분을 선정해 인터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이 최 목사님 부부를 보내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고 해 이렇게 불쑥 찾아왔습니다.”

청천벽력 같았다. “잘 생각해 보시고 선교사로 가실 생각이 있으면 내일 저녁 총회 선교부 모임에 참석해주면 좋겠습니다.”

내일 저녁 모임까지는 30시간 정도가 남아있었다. 우리 부부는 놀란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가 손을 맞잡고 기도했다. 선교사의 생활이 어떤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고생길인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미국 유학길은 지상천국, 선교사의 길은 미지의 땅. 인간적 갈등과 고민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기도하는 가운데 새벽녘에 이르러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선교의 길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공부하는 길은 다시 열릴 수 있지만 주님이 부르시는 선교사의 길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이 아닌가. 나는 덤으로 살아왔는데 주님이 부르신다는데 어찌 순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총회의 부름에 응하기로 했다. 선교부 모임에 참석, 나의 결정을 전하자 선교부는 곧바로 우리를 태국 선교사로 파송할 것을 결의했다.

홀어머니와 아직 어린 두 동생을 남겨 두고 전혀 알지 못하는 선교지로 떠나야 한다니 마음이 무거웠다. 여기저기 주름살이 팬 어머니의 거칠어진 손을 부여잡았다. 불효자가 된 듯해 죄의식이 가득 찼다. ‘어떻게 해야 어머니와 어린 두 동생을 도울 수 있을까.’

깊은 시름에 잠긴 나에게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여보, 장남으로서 어머님을 잘 모시고 동생들을 보살펴야 마땅한데, 이렇게 떠나게 됐으니… 하지만 우리가 떠나더라도 큰 어려움 없이 사실 수 있도록 해 드려야만 해요.”

“어떻게 해 드렸으면 좋겠소?”

“우리의 장래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우리가 가진 전부를 어머니께 드려요. 일단 제가 병원 일을 하며 모은 돈과 당신이 받는 사례비를 드리기로 해요. 그리고 선교사로 파송되면 매월 120달러씩 선교비를 지원받기로 했으니 그중 20달러 정도는 어머니께 드리기로 해요.”

아내는 매우 구체적으로 제안했다. “고맙구려. 당신 말대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합시다.” 지금도 그때의 아내 모습을 떠올리면 감동이 몰려온다.

우리는 가진 것을 다 털어 서울 모래내에 땅 200여평을 샀다. 또 어머니가 그곳에서 사시도록 15평짜리 집을 지어드리기로 했다. 어머니는 그곳으로 이사하신 뒤 남는 땅에서 양계 일을 하셨다. “이 어미가 다른 일이라면 절대 너를 보낼 수 없어.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너를 살려주셨으니, 어디든 가서 주의 일을 하여라. 하나님께서 늘 너와 함께하여 주실 것이다. 나도 너를 위해 늘 기도하마.”

정리=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