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수의 영혼의 약국(95)
입력 2011-04-11 10:19
不仁之病
나와 다른 두 사람(회사 직원이 아닌) 그리고 정세환 장로는 일행보다 조금 뒤에서 느긋하게 히말라야 랑탕 계곡을 걸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많은 대화를 하게 되었죠. 무신론자인 이원상 선생은 줄곧 내게 데이비드 밀의 ‘신은 없다’는 책을 내용으로 하여 질문을 하셨고, 나와 같은 사외인(社外人)인 한상훈 장로는 카렌 암스트롱의 ‘신을 위한 변론’으로 화답을 하는 형국이었습니다. 정세환 장로는 기업의 리더답게 ‘신앙과 경영’에 대한 자기 철학을 말했습니다. 걷기만큼이나 대화도 유익했습니다. 진정성을 담보한 대화가 늘 그렇듯이 말입니다.
손발이 마비되어 감각을 잃는 병을 옛날에는 불인(不仁)이라고 했답니다. ‘불인’이라는 말은 ‘죽었다’는 뜻입니다. ‘불인’(不仁)이 죽은 것이니 산 것은 ‘인’(仁)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복숭아나 살구 씨를 심어서 그 싹이 트는 것을 도인(桃仁) 행인(杏仁)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仁’이라 할 때 그것은 단순히 ‘어질다’ ‘착하다’는 어떤 행위보다는, 손발이 움직이는, 죽은 시체처럼 굳지 않은 ‘생명성’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문에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들을 ‘생명’이라 하지 않고 ‘물건’이라 합니다. 물건은 하나, 둘 하며 세는 것입니다. 세는 것들의 한자 표현은 ‘개’(個)입니다. 그런데 ‘굳을 고’(固)앞에 ‘사람 인’(人)이 붙어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딱딱하게 굳어 버린(固) 사람이(人)바로 물건(個)이라는 뜻입니다.
서구문명에 익숙해진 오늘날, 개인이니 개성이니 개체니 하는 말들은 마치 지식인의 숙제요 사명처럼 되어 있어요. 그러나 한자로 조명해 보면 ‘개’(個)라는 문자 뒤에는 이렇듯 살벌하고도 무서운 그림자가 숨어 있습니다. 현대 문명의 아이콘(icon)이기도 한 ‘패스워드’(password)는 결국 생명의 연대감을 상실한, 시체와 다름없는, 물건이 되어 버린 사람을 상징하는 기호가 된 것입니다. 굳이 자원(字源)을 따지지 않더라도 그리고 한자가 빛을 잃은 오늘날에도 다른 사람을 칭할 때 한 개, 두 개 한다면 화를 낼 것이 아닙니까? 서양의 ‘개’(個)는 사랑스러운 것이지만 우리에게 ‘개’(個)는 모욕적인 것입니다.
결국 인간을 ‘개’(個)로 생각하고 있는 서구문화와 인간을 ‘인’(仁)으로 파악하여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한자 문화권에서는 같은 기업, 산업이라고 해도 그 기본적인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미국 상품이 일본 상품에 밀린 이유도 기술이나 자본이 아니라 소비자를 생각하는 인간관계의 결여에 있습니다. 추잉검을 만들기는 미국이 만들었지만, 그것을 세계에 가장 많이 판 것은 일본이랍니다. 왜냐하면 일본 사람들은 껌을 씹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의치에 달라붙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이죠. 거기서 ‘서비스 정신’이 나왔고 그것은 현대화된 ‘인’(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세대를 말한다면 ‘인인주의’(仁仁主義)가 보다 새로운 열쇠가 될 겁니다. 그러니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인이라도, 건설회사라고 해도 인간의 인연이나 그 인간관계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이처럼 인간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인인주의’(仁仁主義) 기업경영은, 기독교 신앙의 주체인 하나님과 사람을 제일로 ‘사랑’하라는 원칙과도 부합하는 것이고, 메주가 뜨고 김칫독이 익을 때를 기다릴 줄 알았던 민족 문화정신과도 상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벽에 부딪혀 있습니다. 산업뿐만이 아닙니다. 정신과 종교, 개인과 집단, 사람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개’(個)와 ‘인’(仁)의 해석정신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21세기는 ‘영성의 시대’라는 말을 합니다. 피터 드러커 같은 이는 자주 ‘경영으로서의 영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짐작컨대 세상이 말하는 이 ‘영성’과 기독교가 말하는 ‘영성’의 그 접점이 ‘인인주의’(仁仁主義)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허태수 목사(춘천 성암감리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