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재희] 아주 특별한 목련

입력 2011-04-10 19:20


갑천 변 가로수 길을 따라 우윳빛 목련이 흐드러지게 봄을 알리고 있다. 고운 꽃들을 바라보며 길을 오갈 수 있다는 즐거움만으로도 요즈음은 행복하다. 우중충한 겨울의 흔적을 지우며 제일 먼저 봄을 알리는 목련의 탐스러운 하얀 꽃이 당당하고 자신만만하다. 그 당당함과 품위 있는 자태 그리고 그 안에서 은은하게 뿜어 나오는 향기는 목련만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매력이 아닐까 싶다.

내게는 아주 특별한 목련이 한 그루 있다. 이 목련은 교직에 오랫동안 몸담고 있는 남편을 위해 오래전 제자들이 기념수로 심어 준 것이다. 아마도 제자들은 목련과 같이 고결하고 당당한, 그러면서도 진한 삶의 향기를 지닌 스승이 되어 달라는 무언의 부탁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교정 한쪽에 심겨진 목련을 바라보며 매년 봄 이런 소망에 걸맞은 튼실한 하얀 꽃들이 만발하기를 기대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 목련은 한 해가 가고 다음 해가 되어도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했다. 처음 몇 년은 그러려니 했지만, 몇 년의 세월이 더 흘렀는데도 비실비실 몇 송이의 꽃만을 피우다가 서둘러 져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목련 곁에 스승에게 고마움을 전한다는 팻말만 없었더라도 나와 상관없는 못난 목련으로 쉽게 외면해 버릴 수 있었겠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몹시 민망하고 거북했다.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나무가 꽃을 제대로 피우지 못하는 이유를 알 만한 분께 여쭈어 본 적이 있었다. 그분은 그 부근 공사를 한 후 남은 콘크리트를 그곳 어디엔가 묻어 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아마도 그것이 원인일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결국, 목련이 서 있는 곳은 나무가 자라나기에 적합하지 않은 콘크리트가 섞인 땅이라는 이야기였다. 목련이 그렇게 척박한 땅에 심겨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튼실한 꽃을 피우지 못한다고 부끄러워했는데, 목련은 좋지 못한 땅에서 오랫동안 생존을 위한 힘겨운 싸움을 홀로 하고 있었나 보다. 그동안 목련을 창피해 했던 것이 몹시 미안했다. 탐스러운 꽃은 고사하고 죽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어 준 것만으로도 목련은 대단한 삶의 업적을 이루어 낸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척박한 환경 가운데서 꿋꿋이 그 자리에 있어 준 것이, 부족하지만 매년 힘을 다해 꽃을 피우려고 애써준 것이 고맙고도 안쓰러웠다.

제자들이 기념수를 통해 스승에게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단순히 고결하고 당당한 스승이 되어 달라는 바람만은 아니었나 보다. 얼마나 많은 튼실한 꽃을 피웠는가에 의해서만 평가 받는 시대에, 부디 과정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스승이 되어 달라는 부탁의 말을 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그래서 더 많은 격려와 사랑이 필요한 제자들도 있음을 기억해달라는 진심 어린 부탁을 척박한 땅에 심겨진 목련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김재희(심리상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