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찬영 (6) 눈빛 맑은 그녀와 만난지 이틀만에 약혼
입력 2011-04-10 19:32
인민군 장교는 우리 몇 사람을 따로 세웠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기도했다.
‘주님, 저는 이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들을 따라 도저히 북으로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따로 섰습니다. 결과를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 뜻대로 하여 주옵소서.’
중화기로 무장한 인민군 사이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못 가겠다고 한 사람들은 다 나가시오.”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우리 뒤에서 기관총을 난사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그곳을 빠져나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또다시 내 생명을 구해주신 것이다.
다음날인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었다. 미군이 마포까지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오래 전부터 미국 유학을 꿈꾸며 틈틈이 영어공부를 했는데 한 번도 영어를 제대로 사용해본 적이 없었다. 영어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미군들에게 가서 시험해보고 싶어졌다. 용기를 내 미군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미군들은 내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좌절감이 밀려왔다. ‘내 영어가 이렇게 형편이 없었단 말인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군 통신정보부대 소령의 부탁으로 통역관이 될 수 있었다. 일년 남짓 통역관으로 영어를 배울 기회도 가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선교사 훈련이었다. 하나님은 죽음의 고비를 몇 번씩 넘기며 확고한 신앙을 갖게 한 뒤 미군에게 영어까지 배우게 하신 것이다.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전쟁터에서 선교사 훈련을 받은 셈이다.
1952년 11월 대한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50년대 결혼 상대로 목사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신학교 동기들 가운데 3년 가까이 통학을 같이한 친구(홍동근 목사)가 있었다. 그는 나에게 자주 결혼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내가 중신을 한번 서 볼까? 최형은 어드런 사람이 좋으시갔소?”
어느 날 그는 자못 심각한 어조로 얘기를 꺼냈다. 그는 “신학교에 들어오기 전 깊이 존경했던 김예진 목사님이 있었다”며 공산당에 순교 당한 김 목사님의 셋째 딸이 혼기가 찬 여의사라고 소개했다. 그는 을지로의 한 허름한 중국식당에서 우리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했다. 그녀는 장기려 박사를 도와 부산복음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무슨 말을 그녀에게 건넸는지 확실히 생각나지 않지만 맑은 호수와 같은 눈빛에 빠져든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그녀는 열일곱 살 때부터 결혼을 위해 구체적인 기도를 해왔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목사 사모가 되겠다는 결심을 오래 전부터 했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우리 집 형편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아버지는 중국에서 일찍 돌아가셨고, 저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습니다. 가난해서 집도 없이 어렵게 삽니다. 더구나 장남이고요. 돌봐야 할 어린 동생들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바보스러울 만큼 진실하게 얘기한 게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같았다. 훗날 그녀는 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런 착한 사람하고 결혼하면 행복하겠다는 확신이 생겼어요. 잘 아는 목사님에게 소개를 받아 좋은 사람일 거라고 대충 짐작을 했지만요.” 그녀는 내 얘기를 들으면서 ‘아, 하나님께서 나를 이 사람과 짝지어 주시는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그 길이 어떠하든지 순종해야지’라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우리는 만난 지 이틀 만에 작은 진주반지와 만년필을 각각 예물로 교환하고 약혼식을 했다. 만난 지 한 달 반이 지난 11월 24일에는 결혼식을 올렸다. 한경직 목사님이 주례를 서주셨다.
정리=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