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은 세상의 바탕… 예술은 불행의 씨앗”

입력 2011-04-08 17:32


최종천 시집 ‘고양이의 마술’

최종천(57)은 시인이기 전에 노동자다. 고교 진학 후 연탄가스 중독사고로 인해 학업을 중단한 채 일찌감치 생활전선에 뛰어든 그는 구두닦이, 맥줏집 종업원, 중국집 배달원 등을 전전하다 스무 살 무렵부터 용접공으로 지금껏 일하고 있다. 노동한 날수는 꼼꼼히 수첩에 기록하고 일을 하지 않는 날에 독서와 시 쓰기를 병행하고 있는 그는 날 것의 언어로 노동의 참의미와 인간을 탐구한 첫 시집 ‘눈물은 푸르다’로 2002년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외모는 투박하고 수수하지만 내면은 섬세하고 철학적이다. 그가 노동현장에서 체득한 불꽃 튀는 진실성 앞에서 많은 시인들은 시를 찢어야 할지도 모른다. 결혼도 안하고, 앞으로도 할 계획이 없는, 보통사람들과 좀 많이 다른 그가 최근 펴낸 세 번째 시집 ‘고양이의 마술’(실천문학사)의 표제작을 읽어본다.

“우리 공장 고양이는 마술을 잘한다./어떻게 암컷을 만났는지 그리고 역시나/도대체 어떻게 새끼를 여덟 마리나 낳았는지/네 마리는 엄마를, 다른 네 마리는 아빠를,/정확하게 닮았다. 밥집에서 밥도 오지 않았는데/일하는 나를 올려다보며 큰 소리로 외친다./그 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우리도 배가 고파온다./(중략)/사람인 나는 못하는, 시집가고 장가가고/돈 없이도 살 수 있는 고양이의 마술이다.”

사람과 고양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마술을 부리는 시다. 고양이의 본능적인 삶에 오히려 사람이 견인되고 있다. 삶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는 나오기 어려운 내용이지만 그는 시를 불신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지금 지구에서 생산되는 에너지가 문화를 통해 쓰레기가 되고 있다. 시도 쓰레기다. 나는 문화가, 시가 결국 인간에게 있어 쓰레기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시하기 위해 시를 쓴다.”

일찍이 문학평론가 김우창으로부터 “예술과 노동을 잇는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는 예술 따위를 믿지 않는다. 노동을 믿는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예술 때문에 불행해졌다. 반면, 그가 말하는 노동은 세상을 이루는 바탕이다. 세상의 중심이면서도 언제나 주변부를 자처하는 노동. 그것이 그의 시를 지탱하는 힘이다.

“시가 이론적인 것이 되는 것을 감수하고 더 쓴다면/문화의 것들은 썩어서 땅에 흡수되지 않는다./다시 생명으로 환원되지 않는다./이렇게 무질서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단언하건대 예술이란/자연을 고장 내놓은 것들이다./나의 시는 예술이기를 포기한다.”(‘나의 시’ 부분)

그는 노동의 영속과 예술의 비영속 간의 간극 사이에서 시로 쓴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진화해왔고 자연을 가공하여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얻어낸다. 노동계급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사제(司祭)라는 것이다. 그는 “절대적 실체이며 실재인 자연의 연장선에서 노동은 인간에게 유일한 실재”라고 말한다. 소박하지만 억센 그의 시론이다.

노동이 시보다 앞선 실체이자 실재임을 보여주는 시가 있다. 한국작가회의에서 해마다 보내주던 ‘작가 수첩’에 노동 일수와 일당을 기록해온 그는 작가회의가 예산 부족으로 수첩을 3년째 보내오지 않자 여백도 없이 오로지 주소뿐인 한국시인협회의 ‘회원 수첩’에 빗대 이렇게 쓰고 있다.

“작가회의에서는 왜 작가수첩을 보내주지 않는가?/시인협회에서는 왜 시인수첩을 보내주는가?/내 일당의 노동은 어디에 기록해야 하나?/시인들은 말한다. 시는/권력도 돈도 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그렇다면,/나는 시인들의 마빡에다가 내 일당을 기록하고 싶다.”(‘작가수첩’ 부분)

그는 노동의 유효성과 예술의 무능성을 노골적으로 폭로한다. 그에게 시는 예술인 한에서 불구의 춤이다. 그런 그가 시를 놓지 않는 이유는 뭘까. 궁금증을 풀어줄 단서가 있다. “발레리가 말하기를 걸음은 수단이지만/춤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걸음을 배우며 아기는 춤을 잃어가리라/곧게 서서 죽음을 향하여 직선으로 걸어갈 것이다/나는 잃어버린 춤을 되찾았다/춤은 불구의 것이다 춤을 추는 것은/죽음으로 곧장 가기를 망설이며/말을 버리고 말하는 고장 난 몸짓이다/온통 불구인 삶을 보여주는 것이리라”(‘춤을 위하여’ 부분) 시마저도 불구의 삶을 보여주기 위한 몸짓이기에 그는 시를 쓰는 것이다.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