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상온] 허물어지는 인종주의의 벽
입력 2011-04-07 17:35
‘인종주의’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먼저 떠오르는 나라가 독일이다. 두말 할 것 없이 나치스 때문이다. 금발에 푸른 눈, 창백한 피부의 아리안족이야말로 모든 인종보다 우월한 ‘지배 종족’이라고 주장하며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과 ‘생명의 샘(Lebensborn·순수 아리안 혈통의 대량생산을 위해 독일과 유럽 전역에 설치한 인종교배 실험장) 프로젝트’ 같은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던 나치스.
그러나 독일의 인종주의 역사는 나치스 이전부터 찾아볼 수 있다. 가장 악명 높은 사례가 20세기 최초의 인종청소(genocide)로 여겨지는 ‘헤레로와 나마콰의 학살’. 다른 유럽국들보다 뒤늦게 제국주의 식민경쟁에 뛰어든 독일은 1904년부터 1907년 사이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오늘날의 나미비아)에서 헤레로족과 나마족이 연이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그 결과 최소 2만4000, 최대 10만명에 이르는 헤레로족과 1만명의 나마족이 목숨을 잃었다. 대부분은 사막으로 쫓겨난 뒤 로타르 폰 트로타 장군이 이끈 독일군이 돌아갈 길을 막아버리는 바람에 굶주림과 갈증으로 사망했지만 독일군이 사막의 우물들에 조직적으로 독을 풀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전비(前非)에 대한 반성으로 2차대전 후 독일은 반인종주의 및 개방사회 건설에 힘써 상당한 성과를 일궈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한 조사 결과 독일은 2010년 현재 세계에서 (외국 이주민 및 타인종에) 가장 관대한 나라 3위에 꼽혔다(참고로 독일 정부는 2004년 헤레로와 나마콰 인종청소를 시인하고 공식 사과했다).
그럼에도 오늘날 독일에 인종주의는 여전히 남아 있다.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이주자(또는 후예)가 정계와 경찰, 사법부 등 중요한 공공기관에서 요직을 맡기는 대단히 힘든 실정이다.
그런데 그런 독일에서 베트남 출신 입양고아가 곧 연방 부총리 자리에 오른다. ‘약관’ 38세의 필립 뢰슬러 연방 보건장관. 원래 의사인 그는 일찌감치 정계에 투신한 뒤 자유민주당의 유력한 정치인으로 성장해 아시아계 최초로 연방 각료가 된 인물.
이제 자민당 당수로 지명됨에 따라 독일 역사상 최초의 외국계, 그것도 아시아계 부총리가 되는 것이다. 흑백 갈등의 나라 미국에서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데 이어 ‘아리안 신화’의 나라 독일에서 아시아계 연방 부총리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 강고한 인종주의의 벽이 서서히 허물어져가고 있음을 느낀다면 너무 성급할까?
김상온 논설위원 so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