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싹튼 인문학, 그 뿌리를 아십니까
입력 2011-04-07 17:39
인문학의 싹/김기승 외/인물과 사상사
인문학에 해박한 사람은 많다. 세계사의 흐름과 문예사조의 조류, 서양 철학사의 흐름을 꿰차고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한국의 인문학’으로 한정한다면 어떨까. 우리 사회의 인문학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얼개를 갖추게 됐는가를 묻는다면 자신감을 보이던 사람도 흐릿하게 답변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 인문학의 본류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소홀했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싹-오늘의 한국 인문학을 있게 한 인문고전 12선’은 국내 인문학자들이 벌인 대중강연을 묶었다. 강연은 서울 계동 인문학박물관에서 2009년 12월부터 3개월여에 걸쳐 진행된 것으로, 강사들은 일제 강점과 분단이라는 상황에서 발아된 우리의 고전을 중점적으로 강연했다.
‘고전’이란 단어가 갖는 무게감 때문에 지레 어려울 것이라 예상한다면 오산이다. 강사의 강연을 구어체 그대로 옮기고, 강사와 청중 간의 질의응답을 생생하게 담는 형식을 취해 예상보다 수월하게 읽힌다. 강사로는 양보경 성신여대 지리학과 교수, 서호철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학과 교수, 오제연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등 12명이 나섰다.
릴레이 강연에 동참한 이들이 발굴해낸 ‘우리 인문학의 싹’은 모두 12개였다. 각각 텍스트 1개씩 엄선했고, 이 중 10개는 1920∼60년대 저작들이었다. 우리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서적들인 셈이다. 하지만 책 이름만 놓고 보면 생소한 것이 대부분이다. 저자들도 낯선 이름이 많다.
예컨대 ‘제2강’에서 다뤄진 ‘조선문명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23년에 발간된 ‘조선문명사’는 우리나라 문화의 특수성을 분석하고 서양의 역사와 견줬을 때 나타나는 한국 역사의 보편적 특징을 포섭한 책이다. 저자(안확)는 중국 문화와 조선 문화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태도는 당시 조선 사학자들의 역사관을 가늠해보는 계기를 제공한다.
강사로 나선 류시현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교수는 “(안확을 비롯한 당시 연구자들의) 다양한 조선문화연구의 경향성을 검토하는 작업은 오늘날 한국문화연구의 원형 내지는 형성과정에서 나타난 비균질적이고 다층적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말한다.
‘조선문명사’ 외에도 ‘숫자조선연구’ ‘조선교육사’ ‘신조선혁명론’ ‘미학개론’ ‘조선신화연구’ 등의 서적들이 다뤄졌다. 텍스트의 내용과 저자의 생애가 갖는 상관관계, 당시의 시대상과 반박 논리가 교차된다. 이 때문에 책을 직접 읽지 않고도 전체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강성원 인문학박물관 학예실장은 “(각 강연에서 다뤄진 책들은) 학계나 문화계에 뿌리내리지 못했지만 우리 국학의 저간을 이루고 있다”고 설명했다.
‘인문학의 싹…’은 문학비평가 김동석이나 경제사학자 백남운의 글처럼 저자의 월북으로 접근이 불가능했던 저작들도 다뤘다. 김동석은 해방 공간에서 지식인의 길을 강조하며 세상의 속살을 들추는 역할을 자임했던 인물이지만 지식 사회의 유행을 좇기 시작하면서 달라졌다. 무비판적으로 북한 체제를 수용하고 예찬하며 김일성을 찬양하게 된다.
손정수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는 “시대가 바뀌면 또 먼저 입장을 바꾸는 이들이 지식인”이라며 “김동석은 지식인의 그런 속성을 새삼 반성하게 하는 존재”라고 규정한다. 북한최고인민회의 의장까지 지낸 백남운이 50년에 작성한 여행기 ‘쏘련인상’을 다룬 강연은 당대 지식인의 ‘대소(對蘇) 인식’을 추정해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이처럼 ‘인문학의 싹…’은 한국 인문학사의 족보에 숨어있는 성과물을 끄집어낸다. 각 저작들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을 원한다면 다소 실망할 수도 있지만 우리 인문학의 궤적을 좇는 데 도움을 줄만한 지도, 혹은 인문학에 대한 흥미를 자극해 줄 애피타이저로서는 손색이 없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