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모세 선교사 “예수님의 비유는 렌즈 같은 것… 당시 배경까지 알아야 해석 가능”
입력 2011-04-07 17:57
“예수님의 비유는 수많은 해설서나 주석서의 도움을 받아야만 해독이 필요한 암호문이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1세기 당시 청중들은 아무도 그 심오한 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열린다 성경’ 시리즈로 유명한 류모세 선교사는 최근 ‘열린다 비유,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출간한 것은 성경 배경과 비유에 정통한 목회자(선교사) 양성의 시급성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스라엘 투데이’ 편집장이기도 한 류 선교사는 11년간 이스라엘에서 사역하면서 예수님 시대의 청중이 돼 성경을 보다 총체적으로 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 땅의 모든 목회자들이 예수님과 1세기 청중 사이에 공감하던 그때의 현장으로 되돌아가 그 원초적 의미를 되새기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감 없이 전달할 수 있게 되는 날까지 집필 활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히브리의대 약리학 박사인 류 선교사는 ‘열린다 성경’ 시리즈 총 7권 외에도 ‘이슬람 바로보기’ ‘유대인 바로보기’ 등을 펴냈고 이스라엘에서 ‘현장체험 성경일독학교’를 진행해 왔다.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하는 ‘렌즈’였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왜곡된 진리 속에서 살아왔음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 나라의 참 진리를 바라보게 했습니다.”
류 선교사는 “동일한 비유를 놓고 1세기 청중과 현대의 성경 독자간 이해가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알레고리(allegory)라는 해석방법을 통해 신비화, 은유화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알레고리는 하나의 비유에 등장하는 각각의 요소에 독특하고 서로 다른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해석방법이다. 어거스틴의 알레고리 해석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30∼37)에 적용하면 예루살렘은 천상의 도시, 여리고는 죽을 운명의 인간 또는 죄로 가득한 세상, 강도는 사탄과 원수들,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루터는 알레고리를 ‘밀랍(wax)의 코’(마음대로 구부릴 수 있는 어떤 것)와 같은 해석방법이라고 비판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기 때문이다.
만일 알레고리가 예수님의 비유를 해석하는 유일한 도구라면 기독인들은 결코 어거스틴과 같은 탁월한 신학자의 도움 없이는 예수님의 가르침 중 3분의 1이나 차지하는 비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류 선교사는 서구화된 기독교 스펙트럼만으로는 예수님의 비유뿐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식물, 생활풍습, 동물, 절기, 성전, 광야 이야기 등을 정확하게 깨달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조선시대 문화 배경을 모르면서 조선을 이해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며 “목회자들이 성서시대 유대인의 역사적, 지리적, 문화적 상황에 대해 해박할 때 현대 유대인에게도 기독교 복음을 변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예수님이 ‘어떤 사람이 혼자 예루살렘(해발 600∼800m)에서 여리고(-250m)로 내려가다가’(눅 10:30)라고 했을 때 1세기 청중들은 아마 등골이 오싹하고 식은땀을 흘렸을 수 있다. 예루살렘과 여리고를 잇는 길은 강도들이 우글거리는 우범지역으로 악명이 높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뉴욕 맨해튼의 할렘가 뒷골목을 걸어가다가’와 같다는 뜻이다. 기원 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기 위해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갈 때 선발대를 앞서 보내 주변의 강도 소굴들을 소탕했다는 게 이 같은 유추를 가능케 한다.
류 선교사는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눅 10:30)에서도 이 여행객이 강도에게 반항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중동 지역의 강도들은 순순히 물건과 돈을 내놓은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고 물건만 뺏고 돌려보내는 게 상례였다. 그는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누가 나의 이웃인가’가 아니라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가’로 율법사의 질문 흐름을 바꾸셨다”면서 “예수님은 복음을 단순하고 명쾌하게 전한 우리가 반드시 본받아야 할 ‘스토리텔러’”라고 했다.
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