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카메라에 담긴 것은 자연의 힘이 남긴 뒷모습

입력 2011-04-07 17:55


포토저널리스트 조성수

자연재해가 갖고 있는 힘이 있다. 전쟁은 그걸 따라가지 못한다. 전쟁은 흔적이라도 남기는데, 그래서 뒤쫓아 갈 수 있는데, 쓰나미는 말 그대로 싹 쓸어간다. 내 카메라에 담긴 것은 폐허만 남은, 자연의 힘이 남긴 뒷모습이다….

일본 대지진 현장에서 돌아온 지 사흘째. 지난 4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스튜디오에서 만난 포토저널리스트 조성수(43)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전 세계 분쟁과 재난 현장에 뛰어든 지 15년쯤 됐다. 그동안 이 사람만큼 많은 사선(死線)을 넘어본 한국인 사진가는 없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뉴스위크 뉴요커 등과 손잡고 일한다. 이번엔 동일본 대지진 발생 이틀째인 지난달 12일 후쿠시마(福島)로 들어가 21일간 센다이(仙臺) 게센누마(氣仙沼) 리쿠젠타카타(陸前高田) 가마이시(釜石)를 취재했다.

대지진 1주일 만인 지난달 18일쯤 국민일보를 포함해 대부분의 한국 언론이 도호쿠(東北) 지역 취재진에 철수를 지시했다. 후쿠시마 제1원전의 방사능 물질 유출로 취재진의 피폭을 우려한 조치였다. 미국 정부가 주일미군에 원전 반경 80㎞ 밖으로 대피토록 권고한 시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씨는 도호쿠에 남아 작업을 계속했다. 2004년 12월 인도네시아 반다아체 쓰나미 사태 때도, 1995년 1월 일본 고베 대지진 때도 그의 체류기간은 공교롭게 3주였다. 그는 “그 정도는 있어야 스토리가 더 나올 수 있을지 없을지 파악된다. 제 스타일이 그렇다”고 말했다.

그의 스튜디오에는 반다아체 쓰나미 현장에서 촬영한 대형 사진이 걸려 있다. 벌판 전체가 부러진 나무와 건물 자재로 덮여 있고, 그 빈틈을 수백구의 검붉은 시신이 메우고 있는 광경. 익사체여서 시신은 하나같이 등을 내보인 채 곤죽 속에 처박혀 있다. 옷 사이로 부풀어 오른 살에는 시즙이 흐른다. 인도네시아 당국은 무더운 날씨 탓에 신원 확인도 없이 트럭에 수백구씩 시신을 실어 매장지로 향했고, 대형 구덩이 안에 밀어 넣고는 흙을 덮었다. 그런데 2011년 일본은 달랐다.

“의용소방대가 시신 수습하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건물 잔해에 깔려 있었죠. 그냥 끄집어내도 될 텐데. 굳이 유압기를 불러오더라고요. 그걸로 건물을 들어올리고 시신을 꺼냅니다. 최대한 훼손되지 않게요. 그러고는 흰색 위생가방에 넣고 베드에 눕힌 뒤 대원 전체가 둘러서서 묵념을 합니다. 한 구 한 구 모두에게. 그걸 보고는 시신 사진을 찍고 싶지 않았어요. 저들이 저렇게 죽은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는데, 그걸 깨고 싶지 않았어요.”

조씨는 “일본인은 슬퍼하는 방식이 달랐다”고 했다. 자기가 살던 집터를 찾아온 노인은 뒷짐 진 채 그저 폐허로 변한 들판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폐허 더미에서 제일 먼저 챙긴 것은 가재도구가 아니라 추억이 담긴 앨범과 사진이었다. 시신 수거가 어느 정도 끝나자 자위대가 바구니 들고 다니며 수거한 것도 사진이었다. 그는 “슬픔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일본인은 기억할 수 있는 뭔가를 먼저 찾더라. 그게 달랐다”고 했다. “쓰나미로 돌아가신 분, 상처 받은 분 모두 하루빨리 일어나기를 기원한다”는 말도 했다.

조씨는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누출로 출입이 봉쇄된 반경 20㎞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핵을 경험해 보지 못해서 무리하진 않았다”고 했다. 잘 알지 못하고 또 몸으로 경험해 보지 못한 위험에는 접근하지 않는다. 수많은 전쟁터에서 그의 생명을 지켜준 비결이기도 하다.

2003년부터 타임 등과 계약하고 총 1년 8개월 동안 이라크의 바그다드 팔루자 나제프 등지에서 전쟁과 테러를 취재했다. 다수 언론이 미군과 동행하는 종군기자 프로그램에 참여해 바그다드로 향할 때 그는 거꾸로 바그다드 안에서 미군 공습을 지켜보다 외곽으로 취재 반경을 넓혀 나갔다. 저항세력의 자폭 테러가 거의 매일 일어나던 팔루자와 나제프에서도 견딜 수 있었던 건 그가 가진 저항세력 안의 네트워크 덕이었다.

1999년 동티모르 내전 때도 밤에만 밀림 속을 이동하며 정부군의 봉쇄와 49곳 무장 검문소를 뚫고 반군을 만나 모습을 담아오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 이란 소말리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등 분쟁이 벌어지는 곳이면 그도 포토저널리즘의 최전선에 있었다.

위험에 대처하고 상황을 돌파하는 노하우는 계속 쌓여만 간다. 조씨는 낯선 나라에 가면 매춘 지역을 먼저 찾는다고 했다. 그런 곳을 돌아보면 치안과 물가 수준이 가늠되고, 그 나라 사람들에게 어디까지 카메라를 들이댈 수 있는지 보인다.

다음은 현지인 운전자를 고르는 일이다. 그곳 사정을 잘 알면서 위험 상황에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동티모르에서도 ‘풍기’라는 현지인 운전자가 있어 학살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이번 일본 도호쿠 취재에서 차를 빌려 제일 먼저 간 곳은 경찰서였다. 거기서 긴급차량 스티커를 발부받은 뒤로는 폐쇄된 고속도로를 마음껏 이용했고, 주유소의 급유 제한도 적용받지 않았다.

조씨는 1987년 6월항쟁 때 사진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려 했으나 한 장의 사진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연세대 학생 이한열의 사진을 신문에서 보고, 그는 “사진이 지닌 힘에 전율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데모하는 현장뿐 아니라, 왜 이 많은 사람이 아스팔트로 나올 수밖에 없는지, 그들의 환경이 어떤 건지, 그런 걸 찍어서 나누고 싶었다”고 말했다. 세상을 바꾸는 무기로 사진을 선택한 것이다.

기자들이 많이 들고 다니던 니콘 카메라를 무작정 구입했다. 당시 카메라는 ‘있는 집 자식들의 전유물’이었다. 주변에 사진을 가르쳐줄 사람이 없었다. 혼자서 핀을 맞추고 노출을 익히고 빛을 느끼면서 찍었다. 장면마다 같은 사진을 수백 롤씩 찍으며 매달렸지만 색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해고 노동자들의 일상을 처음으로 기록해 다큐멘터리로 제작했다. 서울대에서 이 사진들을 빨랫줄에 걸어 전시하고 있는데 한 사진기자가 조언을 했다. 인화하는 약품과 현상하는 약품의 순서가 뒤바뀐 것 같다고. 그는 “그날 정말 화가 났다. 주변에 사진을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었어도 달라졌을 텐데. 3년을 허비한 것”이라고 했다.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사진을 공부한 조씨는 1997년부터 프랑스와 미국의 사진 에이전시에 소속해 활동했다. 뉴욕타임스 라이프 뉴요커 리베라시옹 슈피겔 등 수많은 매체의 커버 사진을 담당했고, 2000년 월드프레스포토 뉴스 부문 1위, 2004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사진’에 뽑혔다.

2007년부터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국제 보도사진 에이전시 아틀라스 프레스를 직접 세워 활동하고 있다. 동시에 한국에서 대학생과 일반인을 위한 포토저널리즘 강의도 한다. 그는 “후배들이 내 몸에 빨대를 꽂고 배울 것은 전부 다 배웠으면 좋겠다”고 했다. 과거 자신에게 사진을 얘기해 줄 친구가 한 명만 있었더라면 하는 심정에서다.

스튜디오 한쪽에는 위성송수신장비와 위성전화가 든 가방이 있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아직 이 가방 지퍼를 열지 않았다. 지난 1일 한국에 도착해 제일 먼저 한 일은 요오드화칼륨을 구하는 것이었다. 요오드화칼륨은 방사선 노출 치료제이자 예방제다. 그는 후쿠시마 원전 주변 폐쇄된 지역에 다시 가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 기회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혼란스럽다고 한다. “방사능에 얼마만큼 노출되는 것까지 괜찮은 건지 아직 정확한 정보가 없다. 일정량이 넘으면 치명적이라는데, 그 일정량에 조금 못 미치면 어떻다는 건지 설명이 없어 애매하다.” 이 문제가 해결된다면 다시 후쿠시마로 들어갈 생각이다. 핵에 대한 공포로 모두가 떠나버린 유령도시. 인류가 처음 접할 이미지에 벌써 그의 가슴은 뛰고 있다.

글=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사진=조성수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