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도심의 봄… 그러나 압구정에 봄은 없다
입력 2011-04-07 17:37
서울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 1층 페라가모 매장에는 아이보리색 스커트가 있다. 소녀 취향의 사랑스러운 치마 밑단에 풀이 무성하다. 강아지풀인지 마디풀인지 껄껄이풀인지 개망초인지 알 수 없지만 이 풀에는 나비와 잠자리가 날아다닌다. 쇼윈도에 걸린, 매장에 딱 한 개밖에 없는 옷. 가격은 187만5000원이다.
페라가모 장미꽃엔 향기가 없다
이 매장에는 색색의 플라워 프린트(이건 꽃무늬와 같은 뜻이지만 다른 용도로 쓰이는 말이다. ‘몸뻬’를 장식한 꽃무늬를 ‘플라워 프린트’라고 표현하진 않는다) 스커트가 있다. “어떤 꽃이죠?” 당황한 남자 직원은 여자 직원을 부른다. 여자 직원이 말했다. “장미 느낌입니다.”
장미로 보이는 이 꽃은 장미가 아닌, ‘장미 느낌’이다. 플라워 프린트 옷을 구입하는 것은 ‘장미 느낌’ ‘풀의 느낌’ ‘봄의 느낌’을 소비하는 것이다.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안느 퐁뗀’의 블라우스(49만5000원)에도, 대나무 잎만큼이나 시원한 소재의 ‘플리츠 플리즈’ 검정 반팔 블라우스(35만5000원)에도 노랗고 빨간 꽃이 피었지만 이름은 없다. 페라가모의 꽃은 영원하지만, 향기는 없다.
봄의 향기는 따로 판다. 화장품·향수 매장이다. 벚꽃, 매화, 철쭉, 개나리, 진달래 향기를 각각 살 순 없지만 여러 꽃을 조합한 은은하고 상큼한 냄새다. 다만 꽃줄기와 이파리가 뿜는 신록의 향기를 뺀 붉고 노란 꽃잎 향기다.
올 봄 콘셉트가 ‘사쿠라 핑크’인 일본 화장품 ‘슈에무라’ 매장에도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봄의 미풍처럼 가벼운 질감으로 모공 없이 매끈하고 화사한 꽃잎 피부를 선사한다는 ‘슈에무라 UV 언더 베이스 무스 사쿠라 컬렉션’(5만2000원)은 몇 주 지나지 않아 금방 떨어지고 마는 벚꽃의 아련함을 담은 한정판이다.
압구정의 봄은 신상품이 입고되는 1월 말 시작된다. 봄꽃 중에서 일찍 피기론 으뜸인 매화보다 빠르다. 지방과 강북의 백화점보다도 빠르다.
봄을 타도, 타지 않은 듯
봄이 와도 다 봄이 아닌 날, 4월인데도 겨울바람이 남아 있다. 압구정에선 왁자지껄 떠드는 삼삼오오 행인을 찾기 힘들다. 조용하고, 무표정하다. 요즘은 이 무표정을 ‘시크(chic)하다’고 표현한다. 활짝 핀 개나리는 경박할 만큼 솔직하고, 매력적이지 않을 만큼 숨김이 없지만 압구정 사람들은 다르다. 멋을 부린 듯, 안 부린 듯, 명품을 한 듯, 안 한 듯, 신상을 입은 듯, 안 입은 듯. 그런 은근함이 압구정이다. 압구정은 결코 만개(滿開)하지 않는다.
올 유행은 선명하고 톡톡 튀는 밝은 색상(패션계에선 ‘비비드한 팝컬러’라고 부른다)이라지만 압구정은 유행을 취사선택한다. 압구정 현대백화점 지하 2층 ‘스타일 429’. 미국 캐주얼 브랜드 ‘레베카 민코프’와 ‘빈스’ 등 10여개 브랜드의 수입 의류·잡화를 판매하는 ‘편집숍’이다. 누구나 알 만한 브랜드는 아니지만 압구정 멋쟁이라면 누구나 아는 ‘뜨는’ 브랜드를 갖췄다.
봄이지만 이곳은 아직 회색, 검정, 갈색, 카키색이 주류다. 지난해 겨울 없어서 못 팔았다는 ‘레베카 민코프’ 가방도 그렇다. 튀는 색상은 주황색 숄더백(79만원) 1개뿐이다. 구희수(38·여) 매니저는 “베이직한 컬러의 레베카 민코프 백은 여러 개 있으니까 이젠 한 시즌만 들 수 있는 포인트 컬러를 한 개 더 살까 생각하는 분들이 주황색 백을 산다”고 말했다. 통계상 이 매장에선 소득 계층이 높을수록 봄 색상을 구입할 확률이 높다. 봄 색상은 ‘경제적 여유’의 상징이다.
“물건 팔 때 ‘김혜수가 입는 브랜드예요’ 이런 말 하면 안 돼요. 그건 손님을 우대하는 멘트가 아니에요. 김혜수가 입었다고 압구정 손님들이 선호하진 않거든요. ‘어머, 요즘 뜨는 브랜드 ○○○ 가방을 드셨네요.’ 구체적으로 손님의 패션을 알아주는 거, 그걸 좋아하세요.”(구희수 매니저)
20, 30대가 입을 수 있는 캐주얼 브랜드가 많지만 주요 고객은 40대다. 지난해 겨울에는 에르메스 가방을 든 70대 할머니가 아이돌 그룹 ‘빅뱅’이 착용한 토끼털 워머(95만원)를 구입했다고 한다. 스타일은 중시하되 계절과 유행을 맹목적으로 따라하는 것, 여기선 촌스럽다.
“무늬가 강한 에트로, 색상이 강한 미소니, 이런 브랜드는 지방과 강북에선 매출이 좋죠. 압구정 고객은 브랜드가 유난히 드러나는 걸 싫어해요. 잘나가는 명품은 심플하고 미니멀하거나 아방가르드하거나. 명품 하면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무겁고 클래식한 스타일은 이제 많이 빠지는 쪽이에요. 끌로에, 스텔라, 발망 등이 잘 나가죠. 손님들이 소재나 디자인으로 포인트를 주는데, 봄 색상은 선호하지 않는 것 같아요.”(갤러리아백화점 압구정점 구나영 명품 MD)
신사동에서 헤어·메이크업 숍을 운영하는 ‘티아라 바이 박은경’의 박은경(40·여) 원장은 “꾸미지 않은 듯 몸에 밴 세련됨과 유연함이 바로 ‘압구정스러움’”이라고 했다. 봄조차 은근히 타야 하는 곳, 압구정이다.
압구정엔 봄바람이 불지 않는다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서 북유럽 분위기의 20, 30대 캐주얼 의류를 판매하는 ‘휴먼 포텐셜’ 김도원(30) 공동대표는 “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그나마’ 많아지는 데서 봄을 느낀다”고 했다. 강북 사람이 더 많다는 강남역의 시끌벅적함과 달리 압구정 로데오 거리는 한산하다. 타 지역이 아닌 실제 강남 3구 거주민이 주로 먹고, 마시고, 쇼핑하는 곳이 압구정이다.
“연예인처럼 멋있고 예쁜 사람이 워낙 많으니까 압구정에서 약속 잡으면 꾸미게 되죠. 그래서 부담스럽기도 한 곳이 압구정이고, 그런 부담이 작용해서 압구정만의 세련됨이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압구정 로데오 거리가 예전처럼 호황은 아니지만, 여전히 연예계 스타와 코디네이터들은 독특한 스타일을 찾아 이곳에 오죠.”
그룹 투애니원, 포미닛, 비스트 등에게 협찬한 이곳 의상 곳곳에도 형광색이 피었다. 그러나 과하진 않다. ‘휴먼 포텐셜’에는 일본인 손님이 특히 많다. 한국 아이돌 스타일을 찾아 여기로 온다.
“식당에서 밥 먹는데 옆자리에 배우 소지섭이 앉아 있어요. ‘어, 멋있네’ 속으로 생각하지 겉으론 눈도 안 마주치죠. 유난스럽게 구는 거, 압구정에선 쪽팔려요. 저도 압구정에 살고 여기서 일하지만 압구정 사람들, 다들 자기가 어느 정도 잘났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압구정동에서 예약제 헤어 숍 ‘더에이’를 운영하는 디자이너 알렉스(24)씨는 이렇게 말했다.
진달래의 꽃분홍색, 봄볕의 따사로움, 산들산들한 봄처녀, 형형색색의 매니큐어, 왠지 모를 설렘, 시원한 웃음소리, 봄날 유난히 멋 부렸지만 약간 어색한 여자들. 압구정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압구정엔 봄바람이 불지 않는다. 봄이 온다면 시크하게, 딱 그만큼만. 압구정이다.
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