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 정용진 부회장 ‘독서 멘토’ 이지성의 책 권하기

입력 2011-04-07 17:44


“어제 베스트셀러 작가님과 저녁 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이 책이 많이 팔릴까봐 걱정을 하시더라는… 그래서 속으로 설마 했는데… 설마가 사람 잡았네… ㅠㅠ.”

정용진(43)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지난달 23일 저녁 이런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신정아씨의 폭로성 자전 에세이 ‘4001’이 출간 하루 만에 2만부 이상 팔렸다고 보도된 날이다. 이 글은 ‘정 부회장이 신정아씨와 저녁을 먹었다’는 얘기로 와전돼 트위터에서 한바탕 해프닝이 벌어졌다.

그와 저녁식사를 함께한 ‘베스트셀러 작가님’은 신정아씨가 아니라 이지성(37)씨였다. 자기계발서 ‘꿈꾸는 다락방’(100만부) ‘여자라면 힐러리처럼’(38만부) ‘스물일곱 이건희처럼’(18만부) 등이 대표작이다. 지난해 11월 펴낸 ‘리딩으로 리드하라’. 인문고전 독서법에 관한 이 책도 14만부 이상 팔렸다.

정 부회장은 신세계그룹 총괄 대표이사로 경영 전면에 나선 지 꼭 1년 됐다. 무지하게 바쁠 재벌 3세 ‘회장님’이 여섯 살 어린 ‘작가님’과 밥 먹으며 책 얘기를 하게 된 사연. 간단하다. 이지성은 정용진의 ‘독서 선생님’이다.

회장님과 작가님

지난 1일 이지성씨를 만난 곳은 서울 홍익대 부근, 꽤 많은 출판사가 모여 있는 동네의 카페였다.

-그 자리에서 신정아씨 얘긴 왜 나온 거죠?

“같이 식사하던 일행이 신정아씨 기자회견을 화제로 올려서 제가 농담처럼 말했어요. 그 책 분명히 종합베스트셀러 1위 할 거다, 그런 책보다는 고전이 많이 팔려야 하는데, 라고요. 정 부회장이 트위터로 이 말을 전하신 듯하네요.”

-정 부회장을 원래 알았나요?

“전혀 몰랐어요. 저는 트위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데, 석 달쯤 전에 독자들이 메일을 보내줬어요. 정 부회장이 트위터에서 제 책 얘기를 많이 한다고. 그런가보다 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같은 얘기를 하더라고요. 인터넷 검색을 해봤죠.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트위터에 ‘고맙다’는 글을 올렸어요. 얼마 후 정 부회장이 DM(트위터에서 특정인에게만 보내는 메시지)을 보냈어요. 만나고 싶다면서.”

-그래서 만났나요?

“비서실 팀장이란 분이 먼저 찾아오더군요. 제가 부담스러워할까봐 오셨대요. 정 부회장이 어떤 스타일인지 한참 설명해주고, 만약 만나게 되면 어떤 얘기 할 건지도 묻고…. 꽤 까다로운 게 면접시험 같았어요(웃음). 그리고 정 부회장과 통화해서 약속을 잡았죠.”

-왜 만나고 싶었다던가요?

“지난해 12월 EBS ‘TV평생대학’에서 인문고전 독서법 강의를 세 번 했어요. 정 부회장이 그러는데, 어머님(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이 어느 날 자기한테 CD를 하나 주더래요. 제 EBS 강의를 녹화한 거였답니다. ‘네가 경영을 잘 하고 싶다면 그 사람(이지성)을 꼭 만나봤으면 좋겠다’ 하셨대요. 그 CD를 보고 트위터에 제 책 얘기를 올렸던 거래요.”

신세계그룹 본사 대표실에서 이씨가 정 부회장을 처음 만난 것은 1월 말이었다.

“(정 부회장이) 너무 솔직해서 좀 놀랐어요. 겸손인지 몰라도 책은 마케팅 서적이나 읽는 정도라더군요. 바쁘기도 하고, 책과 그리 친한 편도 아니고. 그런데 인문서적을 좀 읽고 싶다, 내가 가야 할 길이 거기 있는 것 같다, 독서 멘토가 돼 달라, 하시더군요.”

2년 전에는 인기가수 휘성(29)이 이씨 책을 읽고 메일을 보내왔다. 그는 “연예계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는데, 사람을 모르겠다.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판단할 수 있으면 좋겠다. 혹시 인문고전이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라고 물었다. 이씨는 그때부터 휘성의 독서 멘토가 됐다. 휘성에게 처음 내준 숙제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본기를 진시황편까지 읽어오기였다.

이씨의 독자들은 ‘폴레폴레’란 팬카페를 운영한다. 회원 1만3000여명. 이씨는 회원들과 메일, 트위터, 정모(정례모임), 강의 등을 통해 독서 멘토-멘티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정 부회장과도 그런 관계다. 교습비 같은 걸 주고받지도 않는다. 나도 인문고전 공부하면서 경영하는 사람들에게 궁금한 점이 많다. 격식 없이 얘기하며 서로 배우는 사이”라고 했다.

첫 수업… 첫 숙제

어쨌든 1월 말 그 자리는 정 부회장의 첫 ‘독서수업’이었다. 2시간 동안 계속됐다. 이씨는 ‘블루오션’ 얘기로 운을 뗐다고 한다. 잠시 수업 내용을 엿들어보자.

“블루오션이란 말이 국내에 소개됐을 때 열광하는 기업인들 보면서 참 황당했어요. 블루오션 전략은 경쟁 치열한 기존 시장에 안주하지 말고 경쟁자 없는 새 시장을 창출하란 얘기잖아요? 싸워서 이기려 하지 말고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을 찾으란 건데, 이건 한국인이면 누구나 아는 손자병법 구절을 풀어놓은 것에 불과해요. 고전에 담긴 중요한 경영전략을 누군가 서양말로 바꿔주니까 깨닫는 거죠. 고전을 읽지 않고, 읽어도 사색하지 않아서 그래요.

대형마트 시장에도 여러 경쟁사가 있죠? ‘우리 회사가 경쟁사를 이겼다’고 할 때 기준이 뭔가요? 월 매출이 10억원 더 많으면 이긴 건가요? 그럼 다음달 매출이 떨어지면 진 건가요? 경쟁에서 ‘이겼다’고 하려면 적이 나를 배우러 올 정도가 돼야 하는 겁니다. 소니가 삼성전자 배우러 오듯, 경쟁 기업에 우리 기업 배우는 교육 프로그램 생길 때 이긴 거죠. 경쟁의 목표를 여기에 맞춰야 혁신이 나옵니다. 매출은 도토리 키 재기일 뿐이에요.

플라톤의 ‘대화편’은 시종일관 사물의 본질을 보라고 얘기합니다. 우리나라 경영인들이 인재경영은 비교적 잘하는 것 같아요. 논어를 읽는 분이 많아서. 하지만 본질경영은 찾아보기 쉽지 않죠. 플라톤을 경영에 적용한 대표적 사례가 마크 주커버그(페이스북)와 스티브 잡스(애플)예요.

주커버그는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라는 사립고교를 졸업했어요. 그리스 라틴 고전을 원어로 읽고 가장 우수한 논문을 써낸 10명에게 월계관 씌워주는 게 졸업식 하이라이트인 학교입니다. 주커버그는 이 학교에서 플라톤 마니아였어요. 페이스북이 저렇게 성공한 건 소셜네트워크의 본질을 꿰뚫어봤기 때문입니다.

잡스는 이런 말을 했죠. ‘소크라테스와 한 끼 식사할 기회를 준다면 애플이 가진 모든 기술을 그 식사와 바꾸겠다.’ 소크라테스가 누굽니까? 진리를 찾아 끝없이 질문하다 ‘가장 확실한 건 내가 진리를 모른다는 것’이라 했어요. ‘내가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에서 진정한 혁신이 시작됩니다. 경쟁자들이 컴퓨터의 기능과 가격을 고민할 때 잡스는 소비자가 원하는 것의 본질을 계속 질문했고, 그 답이 디자인이었던 거죠….”

그리고 수업 말미에 ‘숙제’를 내줬다. 유득공의 ‘발해고’와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읽어오기. 다 읽으면 연락해 달라, 두 번째 수업은 그때 하자고 했다.

-두 책을 숙제로 내준 이유는 뭔가요?

“제 생각엔 CEO에게 어마어마한 메시지가 담긴 책들이에요. 자세히 얘기하면 정 부회장에게 숙제의 답을 알려주는 게 되니까 힌트만 말할게요. 발해고에는 경영을 혁명적으로 바꿔줄 새로운 관점이, 정약용의 편지에는 한국 정치 현실에서 기업하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내용만 읽어선 알기 어려워요. 사색을 해야죠.”

신세계 파격적 ‘학자금’… 혹시?

정 부회장은 아직 이 숙제를 끝내지 못했다고 한다. 두 번째 수업은 열리지 않고 있다. 대신 이씨를 자기가 속한 모임에 초대했다. 젊은 재력가, CEO, 크리스천. 세 가지 공통점을 가진 7명이 함께 공부하고 기도하는 모임이었다. 대부분 정 부회장의 동생뻘이고, 미디어 기업 회장을 지낸 한나라당 홍정욱 의원도 참석했다. 이 자리에선 인재경영 얘기를 주로 했다.

“사마천 ‘사기’ 열전의 손자(孫子)편에 오나라 왕 합려가 손자를 처음 만나 시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네가 최고의 전략가라면 내 궁녀들을 최고의 군인으로 만들어봐라’ 하죠. 손자가 오케이, 하고서 궁녀들을 가르쳐요. ‘앞! 하면 가슴 쪽을 보라, 좌! 하면 왼손 쪽을 보라….’ 진지하게 설명한 뒤 ‘앞!’ 했는데 궁녀들이 까르르 웃고 말았어요.

다시 진지하게 설명하고 ‘앞!’ 했는데 또 까르르 웃었어요. 손자가 ‘명령을 거역했으니 군법으로 다스리겠다’면서 합려가 가장 총애하던 궁녀 둘을 처형하려 했어요. 깜짝 놀란 합려가 ‘걔들은 좀 봐주라’ 했는데 목을 쳐버렸습니다. 그러자 궁녀들이 지시에 따르기 시작했고, 합려는 손자를 등용했고, 오나라는 춘추패국이 됐습니다. 이 얘기엔 어떤 교훈이 있을까요?”

신상필벌이 확실해야 조직이 바로 선다는 의견이 많이 나왔고, 이씨의 설명이 이어졌다.

“여기서 핵심은 합려예요.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두 여인을 죽인 사람인데, 손자를 등용했어요. 인재는 이렇게 얻는 겁니다. 자신에게 가장 익숙하고 달콤한 두 가지를 쳐 없앨 수 있어야 인재가 보입니다. 국가든 기업이든 지도자는 먼저 자신에게 엄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진짜 인재경영은 자기경영인 거예요.”

한 참석자가 이런 얘기를 꺼냈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는 직원들한테 너무 잘해주기만 하는 것 같다. 상벌이 확실한 경쟁사에 비해 느슨해 보인다. 그렇다고 기강을 다잡자니 회사 분위기가 경직될까 우려되고….” 많은 참석자가 이 고민에 공감했다. ‘덕치(德治)경영’과 ‘법치(法治)경영’에 대한 긴 토론이 벌어졌고, 이씨는 이런 말로 토론을 마무리했다.

“덕치도 좋고 법치도 좋습니다. 만약 법치경영을 한다면 가장 먼저 적용할 부서가 어디일까요? 인사부요? 인사부 리더는 누구죠? 인사부장이요? 인사부장은 누가 지휘하죠? 김 전무요? 김 전무는 누구 지시를 받습니까? CEO죠. 나(CEO)에게는 엄격하지만 직원들에게는 관대한 것, 그것이 진정한 법치경영과 덕치경영 아닐까요? 다음에 만날 때까지 이 주제로 사색해보셨으면 좋겠네요.”

신세계그룹은 지난 3일 퇴직한 임직원에게도 10년간 자녀 학자금을 지원하는 파격적 복지책을 내놨다. ‘임직원이 만족해야 회사도 큰다’는 정 부회장의 경영철학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그가 혹시 이날 토론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건 아닐까.

쪽방촌의 논어 선생님

정 부회장의 트위터 DM이 날아든 것과 비슷한 시기에 이씨는 이메일을 한 통 받았다. 발신자는 2001년부터 서울역 인근 쪽방촌 사람들을 돕고 있는 김용삼 목사. 봉사단체 ‘소망을 찾는 이’를 이끌며 쪽방촌 아이들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독서인 듯합니다. 그동안 여러 독서를 시키면서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공부방에 와서 아이들에게 인문고전 독서교육을 해줄 수 없을까요?’

이씨는 김 목사를 찾아갔다. 쪽방촌을 둘러보고 돌아와 팬카페에서 공부방 자원봉사자를 모집했다. 경쟁이 벌어질 정도로 많은 신청자 중에 6명을 뽑았다. 이들은 매일 번갈아가며 아이들에게 ‘논어’를 가르치고, 이씨는 매주 이들과 만나 논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다.

그는 두 가지 꿈을 얘기했다. 서울역 쪽방촌에 인문도서관 만들기. 빈민촌 공부방마다 쉽게 활용할 독서교육 프로그램 개발하기. 왜 이런 꿈을 꾸는지, 이제 고전 말고 자기 얘기 좀 해보라 했다.

“제가 처음 떴을 때(‘꿈꾸는 다락방’ 초판은 2007년 5월 발행됐다) 굉장히 많은 기업에서 강의 요청이 왔어요. 에쿠스가 저를 태우러 오고, 가보면 대기업 임직원이 죽 앉아 있고, 1시간 강의하면 300만∼400만원씩 받았죠. 출판사 100여곳에서 거절당했던 무명 작가가 귀족의 삶을 누린 거죠. 그 짓을 1년 정도 했어요. 어느 날 부산에서 강사료에 차비까지 두둑이 받고 KTX로 올라오는데, 창가에 비친 제 얼굴이 너무 추한 거예요. 초등학교 교사 하면서 빈민가 살던 시절, 나처럼 힘든 이들을 위한 작가가 되겠다고 필사적으로 글 쓰던 시절을 까맣게 잊어버렸던 겁니다.”

그는 전북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2000∼2008년 초등학교 교사를 했다. 일찌감치 작가를 꿈꾸며 1997년 시집을 냈지만 아무 반향이 없었고,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 아버지 사업이 망해서 생활이 어려웠다. 절망하던 시절 ‘전투적인’(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인문고전 독서를 그만두지 않았던 것은 여러 자기계발서를 읽고 힘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저서 25권 중에 자기계발서를 8권이나 썼는데 그걸 다 잊고 귀족의 삶에 취해 있었다는 얘기다.

“그 부산발 KTX 열차에서 내린 뒤 1년간 기업 강의를 다 거절하고 칩거했어요. 대신 팬카페에서 무료 강의를 했습니다. 자연히 멘토-멘티 관계가 형성되더군요. 그래서 휘성씨도 알게 되고, 조혜련(개그우먼)씨와도 친해지고, 어쩌다 보니 정 부회장도 만나고, 쪽방촌에도 간 거죠.”

인문고전과 보수·진보 정치

-‘스물일곱 이건희처럼’이란 책도 썼더군요.

“그 책을 3분의 1쯤 썼을 때 이건희 회장이 회장직을 사퇴하고, 3분의 2 정도 썼는데 피의자로 검찰에 출두하더군요. 그에 대한 평가가 가장 안 좋을 때 ‘…이건희처럼’이란 책을 낸 거예요. 출판계에서 ‘이제 이지성 끝났다’는 말이 돌았대요. 그런데 베스트셀러가 됐어요. 서두에 ‘이건희 칭찬 읽고 싶은 분, 이런 책 읽으세요’ ‘비판 읽고 싶은 분, 이런 책 읽으세요’ 하고 두 부류의 책 제목을 죽 나열했습니다. 철저히 배울 점만 쓴 책입니다.”

-왜 그를 배우자고 한 거죠?

“인문고전을 지식 밑천으로 삼은 대표적 기업인이 이병철 정주영 회장이에요. 두 분 다 할아버지가 서당 훈장이었고, 유년시절 치열하게 고전을 암송했어요. 이병철 회장은 박정희 정권에서 고초 겪을 때 ‘장자 달생편’을, 정주영 회장은 고령교 복구공사로 파산 위기에 몰렸을 때 ‘채근담’을 찾아 읽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아버지의 고전 경영을 물려받았어요. 배우고 연구할 가치가 있는 거죠.”

-다음 책은 어떤 내용이죠?

“홍정욱 의원과 함께 인문고전과 한국정치를 주제로 대담집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고전을 통해 정치를 설명해보는 작업이에요. 가능하면 유시민 대표 같은 진보 정치인과도 같은 대담집을 내고 싶어요. 인문고전에서 정치의 길을 찾아보자는 거죠.”

이씨 스케줄에 최근 카이스트 강연이 급히 포함됐다. 학업 부담에 학생 자살이 잇따르자 학생회에서 요청해왔다. 그는 ‘공부 좀 못해도 왜 괜찮은 건지’에 대해 얘기할 생각이라고 했다. 강연은 다음달 10일이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