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염성덕] 낙하산이 기가 막혀

입력 2011-04-06 17:33

미 공군 수송기가 남극 미국 기지로 향한 것은 1999년 7월 8일이었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여의사의 가슴 종양을 진료할 수 있도록 의료장비와 의약품을 공수하기 위해 이륙한 것이다. 곡예비행 끝에 남극 상공에 다다른 수송기 조종사는 영하 87도의 혹독한 추위와 강풍을 무릅쓰고 의료장비 등을 매단 낙하산을 투하한다.

날씨가 풀려 미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여의사는 위성을 통해 본국 의사들의 지시를 받으며 스스로 조직검사를 하고 항암제 치료에 돌입한다. 여의사를 살린 데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악천후 속의 비행을 결정한 공군 수뇌부, 고난도 비행을 성공리에 마친 조종사, 여의사를 헌신적으로 도와준 기지 요원 등. 의료장비를 안착시킨 낙하산의 공로도 빼놓을 수 없다.

공군 조종사와 낙하산과의 관계는 해군 장병과 구명조끼만큼 긴밀하다. 비행훈련이나 교전 중에 기체 결함이 생겼다면 애기(愛機)를 버리고 낙하산에 생사를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적 후방에 침투해 요인 암살, 시설 파괴, 교란 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공수부대원들에게도 낙하산은 생명줄이다. 낙하산을 펴지 못하고 지상에 수직으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한 공수부대원은 “두부를 발로 밟아 으깬 것처럼 된다”고 말한다.

소형기에서 공중 결혼식을 하고 허공으로 몸을 날리는 커플에게는 낙하산이 결혼반지보다 중요한 결혼 소품이다. 교전이 치열한 전쟁터에 군수품을 전할 때도 낙하산은 한몫 톡톡히 한다. 수많은 공수부대원들이 수송기에서 지상을 향해 낙하하는 영화 장면은 잔잔한 바람결에 흩날리는 꽃잎을 연상시킨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낙하산 뒤에 인사가 붙으면 볼썽사나운 단어가 된다. 정권이 바뀌면 대통령 임기 내내 낙하산 인사가 도마 위에 오른다. 공공기관의 장, 감사, 이사, 사외이사 자리에는 어김없이 낙하산·보은·정실 인사가 횡행한다. 조직 발전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데도 논공행상의 수혜자가 된다. 광역자치단체장에 이어 기초자치단체장까지 엽관제를 자행한다. 1977년부터 10년간 시행된 유신사무관 제도를 기존 공무원은 낙하산 인사라고 비판했다. 사무관 승진을 희망하는 고참 주사들은 더욱 그랬다.

요즘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는 준법지원인도 기업 입장에서는 낙하산 인사다. 내년부터 로스쿨 졸업생들이 쏟아져 나올 것에 대비해 책임은 없고 권한만 있는 고액의 변호사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숭어가 뛰니까 망둥이도 뛰는 꼴이 아닐 수 없다.

염성덕 논설위원 sdyu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