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임 원장, 장애아 15명 보듬다… 초·중 동창 40년 우정의 자선무대

입력 2011-04-06 19:03


유리 문틈으로 회색빛 머리칼이 반짝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가수 인순이. 그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백댄서와 하나하나 동작을 맞추는 모습에 정성이 가득해 보였다.

5일 오후 서울 개봉동 남현교회 3층 대예배실. 공연 막바지 준비가 한창이던 인순이의 대기실 문밖은 시끌벅적했다. 공연 시작을 한 시간이나 앞뒀는데 사람들이 줄지어 섰다. 대체 무슨 공연이기에 대가수의 얼굴에선 긴장감이 묻어나고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을까.

오후 7시40분. 인순이가 인파를 헤치며 무대로 한 걸음씩 나아갔다. 객석엔 몸이 불편해 보이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인순이의 노래 한 곡, 동작 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서서히 공연에 녹아들었다. 그 광경을 2층 왼쪽 구석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중년의 여인이 있었다. ‘좋은친구장애인주간보호센터’ 김정임(54) 원장. 꽉 찬 객석과 인순이의 열정적인 무대를 번갈아 바라보며 감회에 젖었다.

공연 한 시간 전

김씨는 초조한 마음으로 일찌감치 공연장을 찾았다. 교회 1층 입구엔 ‘인순이와 함께하는 좋은 친구 장애인 주간 보호시설 후원의 밤’이라 적힌 대형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였다. 그녀는 공연을 총괄했다. 무대와 음향, 마이크, 귀빈석까지 꼼꼼히 챙기기를 반복했다.

공연 한 시간 전인 오후 6시30분, 그의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많은 분이 힘을 주셨으면 좋으련만….’

“자, 이제 두 줄로 서서 표를 내고 공연장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파란색 조끼를 걸쳐 입은 자원봉사자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입장이 시작됐다. 장애인의 손을 잡고 서 있는 할머니가 첫 테이프를 끊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인파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는데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고마움, 아팠던 기억이 복합적으로 떠올랐던 모양이다. 긴 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밝은 웃음을 띤 채 공연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4년 전 일이다. 김씨의 아들 이형원(25)씨는 몸이 아팠다. 지적 장애와 자폐성 장애, 간질까지 앓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견디기 힘든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런 형원을 보며 그녀의 마음도 미어졌다.

형원이는 특수학교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간 형원이는 물론 김씨도 참 많이 고생했다. 매일 아침 등교, 저녁엔 하교를 시켜야 했다. 아이에게 매달려 있느라 자기 시간을 갖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고생을 한 끝에 받은 아들의 졸업장이기에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기뻐하는 아들 뒤에서 그녀는 남몰래 감격의 눈물을 찍어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고교를 졸업한 형원이, 갈 곳이 없었다. 장애를 가진 젊은이들이 보호자 없이 낮 시간 동안 가 있을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특히 형원이 나이에 맞는 프로그램이 있는 복지관을 찾는 건 하늘의 별따기였다.

결국 큰 결심을 했다. “자격증도 있는데 자기가 복지관을 운영해봐.” 지인이 농담처럼 던진 말에 그녀의 귀가 번쩍 뜨였다. 장애인 시설을 직접 운영하기로 했던 것. 아들 등하교를 시키고 남는 자투리 시간에 사회복지학을 공부한 게 어찌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제 돈을 털어 낮 시간 동안 장애인을 보살피는 ‘좋은친구주간보호센터’를 열었다. 보증금 2000만원에 월세 60만원, 조그만 방에서 아들 그리고 친구 4명이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

모두를 자기 아이처럼 생각하며 열심히 했다. 매일 오전 7시, 아이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 승합차에 태워 시설에 데려오고 오후 6시엔 아이들을 집으로 보내줬다. 장애인을 위한 교육과 프로그램을 진행하느라 눈코 뜰 새 없었다.

입소문을 듣고 장애 아이를 가진 부모들이 찾아왔다. 아이들 숫자는 15명까지 늘었다. 사람이 늘어갈수록 더욱 힘들었다. 운영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시 보조금, 시설 이용료, 후원금 정도로는 아이들 점심을 먹이는 것도 빠듯했다.

사회의 편견은 또 다른 어려움이었다. 공간이 협소해 조금 더 넓은 곳으로 이사하려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매번 같은 답. “장애인이라서 좀…. 죄송해요.”

그래도 웃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다. 보람, 그게 있었기에 지금껏 웃음을 잃지 않았다. 장애인의 어머니로서는 형원이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지내며 사회성을 기르는 게 기뻤다. 장애 아이들이 시설에서의 생활을 통해 조금씩 서서히 나아지는 모습을 보는 건 사회복지사로서 느낄 수 있는 큰 보람이었다.

공연 시간이 임박하자 아들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친구들과 손을 잡고 공연이 열리는 대예배실에 들어서는 형원이, 어느 때보다 늠름했다. “얼른 와. 인순이 아줌마 보고 싶었지? 올라가서 재밌게 봐.”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참 고마운, 내 친구 인순이

“여러분, 안녕하세요.” 인순이의 음성은 쩌렁쩌렁했다. 신나는 댄스 음악에 객석은 들썩거렸다. 흥을 이기지 못한 관객 몇몇은 너도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음악에 몸을 맡겼다.

김씨는 무대와 객석을 잔잔히 바라봤다. ‘내 친구 인순이. 참 고마운 친구.’

그와 인순이의 인연은 초등학생 시절 시작됐다. 경기도 연천 궁평초등학교와 청산중학교를 같이 다녔다. 당시 신설학교였던 청산중은 교무실 하나, 교실 하나뿐이라 한 학급 70명의 학생들이 3년 동안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다. 친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둘은 특별히 친했다. 쾌활하고 적극적인 성격이 서로의 마음을 끌었다.

“김인순(인순이의 본명), 그때도 참 노래를 잘했었죠. 화장실, 운동장, 교실 어디든 그에겐 무대였고 녹음실이었으니까요. 아무데서나 노래 불러 시끄럽다고 선생님한테 많이 혼나기도 했어요.”

좋아하는 남학생에 대해 얘기하고, 고민을 털어놓고, 도시락도 나누며 둘은 우정을 키웠다. 중학교 졸업 후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정은 변치 않고 이어졌다.

‘인순이와 함께하는 좋은 친구 장애인 주간 보호시설 후원의 밤.’ 문득 생각하기에 원장이 유명인 친구에게 “한번 와서 도와줘”라고 부탁해 성사됐을 것 같았다. 그런데 반대였다.

“인순이가 ‘너희 아이들 잘 크니? 많이 좁다면서…’라고 물어왔어요. ‘알잖아. 좀 좁은 것 말고는 그냥저냥 괜찮아’라고 답했죠. 도움을 받으려 한 말도 아니었죠.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답이 돌아왔어요.”

“내가 공연을 해서 시설 운영비를 보태면 어떻겠니. 공연료 이런 거는 생각하지 말고 친구!”

조그만 장애인 시설을 위한 한국 정상급 가수의 자선 공연은 이렇게 시작된 거였다.

공연이 열린 이날은 마침 인순이의 생일이었다. 매니저가 “생일은 기쁘게 보내셔야죠”라고 해 스케줄을 비워뒀지만 인순이는 굳이 이날을 공연 날짜로 잡았다. 자신이 태어난 날, 뜻 깊은 공연을 하고 싶었던 게다. 그의 몸 상태는 연이은 공연으로 말이 아니었지만 표정만은 밝았다. “몸이 사실 너무 아파요. 감기에 체하기까지 해서 노래 부르기가 여간 어렵지 않네요. 공연 전까지 약 먹고 정신이 없었죠.”

하지만 인순이는 인순이였다. 최고의 공연을 선보였다. 객석을 가득 메운 1500여명의 관객은 티켓 값 2만원으로 장애인을 돕고 최고 가수의 공연도 즐기는 일석이조의 기쁨을 마음껏 누렸다.

공연이 끝나고 난 뒤 잠잠해진 무대 앞에서 김씨가 친구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내 친구 인순이는 참 솔직하고 담백한 사람이에요. 자신을 속이기 싫어서 뭐든지 열심히, 성실히 하죠. 가수가 안 됐어도 어느 분야에서든 최고가 됐을 겁니다. 저도 친구처럼 되려고 해요. 정직하고 솔직한 사회복지사. 힘들지만 초심을 잃지 않고 제 아들, 그리고 아들만큼 소중한 우리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일할 겁니다.”

40년 우정이 빛을 발한 이날, 팔짱을 끼고 밝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중년 친구의 뒷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조국현 기자 joj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