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찬영 (4) 고아원 아이들 가르치다 신학교 입학

입력 2011-04-06 18:04


“아니, 이거 용무 아닌가!”

“찬영이! 오랜만일세. 이렇게 만나게 되니 정말 반갑네. 내가 자네를 찾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아는가?”

“나는 지금 용산으로 이사하게 되어 짐을 가지러 왔네. 그런데 여기서 자네를 만나게 될 줄이야. 정말 반갑네. 그래 무슨 일로 나를 그리 찾았나?”

“나는 태릉에 있는 국립육아원 부속초등학교 선생으로 있네. 지금 우리 학교에서 선생님 한 분을 더 모시려고 한다네. 자네가 생각나서 수소문했었지.”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태릉의 국립육아원은 오늘의 고아원 같은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총독부에서 사회사업의 일환으로 운영하다가 미국 군정이 시작되면서 미군에서 관할했다. 용무의 소개로 나는 교사가 됐다. 6학년 담임을 맡아 열심히 가르쳤다. 하지만 학생들이 잘 따라주지 않았다. 이유가 궁금해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선생님은 너희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어. 그런데 너희는 왜 공부를 하지 않니?”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중학교에 못 가요. 지금까지 중학교에 진학한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열심히 공부해서 뭐하겠어요?”

마음이 아팠다. 열심히 공부하면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국립육아원을 책임지는 보건후생국장을 찾아가 간절히 부탁했다. 그 결과 역사상 처음으로 육아원 출신도 상급학교에 진학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나는 이 기쁜 소식을 학생들에게 전하고 반에서 공부를 잘하는 여섯 명에게 중학교에 진학하도록 권했다. 최선을 다해 이들을 지도했다. 여섯 명 전원 상급학교에 진학하게 됐다. 어린 아이들의 마음속에 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엄마 아빠가 없는 고아지만 열심히 공부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소박한 꿈을 갖게 된 것이다.

교사로서의 큰 보람을 느끼고 있을 때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됐다.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친구 조요상을 만났다.

“찬영아, 난 지금 감리교신학교에 등록했어. 세상 지식을 가르치는 선생도 귀하지만 영생의 말씀을 가르치는 영적 선생이 더욱 귀하지 않을까. 자네도 나와 함께 신학 공부하면 좋을 듯하네.”

“난 아직까지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어….”

어머니가 어릴 적부터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찬영아, 하나님께 언제나 최고의 것을 바쳐야 한다. 나는 우리 귀한 큰아들 찬영이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기도를 드렸어. 하나님께 너의 인생을 바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나는 고민하며 기도했다. 과거 뜨거운 눈물로 드렸던 회심기도가 생각났다. “주님의 뜻대로,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 써 주시옵소서.” 순간 로마서 12장 1∼2절 중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는 구절이 내 몸에 스며들며 가슴에 와 닿는 것 같았다. 영적 선생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성경과 영어 과목 필기시험과 면접을 통과하고 1947년 감리교신학교에 입학했다. 학생들 가운데 일본이나 중국에서 신학을 공부하다 온 사람도 있었다. 나는 높은 학문 수준에 만족했다. 열심히 공부하던 중 서울에 박형룡 박사가 이끄는 장로회신학교가 세워진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는 원래 장로교 출신이라 감리교신학교보다 장로회신학교가 더 적합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부의 학력인가를 받은 감리교신학교 학생증을 반납하고 48년 무인가 신학교인 장로회신학교 학생이 됐다. 경건한 신앙과 학문이 좋았다. 참혹한 전쟁이 서서히 다가오는 것도 모른 채.

정리=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