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의 만리장성서 나를 만나다… 도보여행 명소로 떠오르는 새만금방조제
입력 2011-04-06 17:31
길 위에 섰다. 아니 인생 앞에 섰다. 일직선으로 뻗은 새만금방조제가 아득한 수평선을 달리다 이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새만금방조제를 옅은 해무가 포근하게 감싼다. 저만치 끝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는가 싶으면 끝은 또 저만치 물러나며 인내심을 시험한다.
바다 위의 만리장성으로 불리는 새만금방조제가 도보여행 명소로 부상하고 있다. 전북 군산시와 고군산군도, 부안군을 연결하는 33.9㎞ 길이의 새만금방조제는 세계 최장 방조제로 알려진 네덜란드의 주다치방조제보다 1.4㎞ 더 길다. 1991년 11월부터 바다를 메워 대한민국 지도를 바꿔놓은 새만금방조제가 완공된 건 1년 전인 2010년 4월.
새만금방조제 도보여행의 출발점은 군산 비응항이다. 빨간등대와 하얀등대가 인상적인 비응항은 우리나라 최초의 다기능 관광복합어항. 유람선을 타면 천혜의 비경을 간직한 고군산군도를 둘러볼 수 있는 새만금 관광의 허브로 해질녘 하늘과 바다를 붉게 채색하는 낙조가 일품이다.
빨랫줄처럼 곧은 새만금방조제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방조제 상단부의 4차선도로는 비응항에서 야미도를 거쳐 신시도까지 14.4㎞ 구간을 일직선으로 달린다. 그리고 신시도에서 살짝 방향을 틀어 새만금홍보전시관이 위치한 부안까지 이어진다. 방조제 곳곳에 위치한 쉼터는 주차장을 갖춘 휴게소로 해넘이, 돌고래, 바람, 소라, 너울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을 가졌다. 자전거도로를 겸한 인도는 가력도에서 부안 새만금홍보전시관까지 공사구간을 제외한 25.5㎞ 구간에 설치되어 있다. 바닥에는 바다를 닮은 푸른색 페인트가 칠해져 걷는 재미를 더한다. 하지만 워낙 먼길이라 한두 시간 걷다보면 지루해지고 마침내 인내력을 시험하게 된다.
“길을 가는 데 가장 불편한 장애물은 자기 자신이라는 장애물이다. 험난한 길을 선택한 인간은 길을 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버리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고 평탄한 길을 선택한 인간은 길을 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 즐거움을 느낀다. 전자는 갈수록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후자는 갈수록 마음이 옹졸해진다.”
소설가 이외수는 ‘길에 관한 명상’에서 자신의 욕망을 버리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려면 험난한 길을 택하라고 권했다. 눈부신 햇살과 시원한 바닷바람, 돌부리 하나 없는 평탄한 길이 오히려 험난한 길로 인식되는 순간 새만금방조제는 도보여행자에게 극기와 포기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한다.
비응항을 출발한 새만금방조제는 수평선 끝에서 가물거리는 신시도를 향해 나그네처럼 길을 떠난다. 방조제를 중심으로 시리도록 푸른 바다가 양쪽으로 펼쳐진다. 이따금 작은 어선들이 뱃고동을 울려보지만 갈매기조차 날기를 포기한 채 너울거리는 물결에 가녀린 몸을 맡긴다. 포기라는 단어가 뇌리를 스칠 때마다 해넘이휴게소와 돌고래쉼터가 나타나 발걸음을 재촉한다.
첫 번째 만나는 섬은 비응항에서 12㎞ 떨어진 야미도. 원래 밤나무가 많아 밤섬으로 불렸으나 일제강점기 때 밤을 야(夜)로 잘못 표기하면서 야미도(夜味島)가 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야미도 앞 간척지에 가장 먼저 리조트 등 상업시설이 들어서게 돼 뜻풀이처럼 밤이 맛있는 신도시가 건설된다는 점이다. 야미도항에는 고군산군도를 한바퀴 도는 유람선과 음식점도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새만금방조제 중간쯤에 위치한 신시도는 선유도, 무녀도, 대장도, 장자도, 관리도, 방축도, 횡경도 등 63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고군산군도에서 가장 큰 섬. 통일신라의 대학자인 최치원이 신치산에 단을 쌓고 글을 읽자 그 소리가 중국까지 들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신비의 섬이다.
신시도에는 섬을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12㎞ 길이의 ‘구불길’이 조성되어 있다. 구불길은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수풀이 우거진 길을 뜻하는 군산의 도보여행길로 현재 7개 코스가 선을 보였다. 고군산군도을 한눈에 감상하려면 199봉에 올라야 한다.
신시도주차장에서 월영재에 올라 왼쪽의 가파른 길을 택하면 199봉이 나온다. 정상은 진달래 군락지로 모진 바닷바람을 이겨낸 진달래가 연분홍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능선 너머로 옹기종기 모여 앉은 고군산군도의 섬들은 해질녘 황금색으로 채색된 바다를 배경으로 시시각각 그림 같은 장면을 연출한다.
199봉에서 남쪽능선을 따라가면 신시도배수갑문과 부안으로 뻗은 새만금방조제가 한눈에 들어오는 옹벽이 나온다. 옹벽은 새만금방조제를 한눈에 조망하는 뷰 포인트. 북쪽의 군산과 남쪽의 부안 사이로 멀리 김제의 만경강과 동진강 물줄기가 아스라하다. 하루 두 차례 신시도배수갑문이 문을 열면 바닷물이 하얗게 부셔지며 쏟아지는 장관을 연출한다. 도보여행길은 신시도배수갑문에서 바람쉼터, 소라쉼터, 너울쉼터. 가력도배수갑문을 거쳐 부안으로 연결되지만 대부분의 도보여행객들은 신시도나 가력도를 종점으로 삼는다. 하루에 33.9㎞를 걷기는 무리인데다 군산 시내버스가 비응항에서 신시도를 거쳐 가력도까지만 운행되기 때문이다.
새만금방조제 도보여행은 걷는 구간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게 장점. 비응항에서 버스를 타고 신시도에 내려 고군산군도를 둘러보고 신시도에서 비응항까지 14.4㎞를 네댓 시간 걸어보는 것도 좋다. 신시도 출발시간을 오후 2∼3시로 잡으면 고군산군도로 시시각각 떨어지는 태양을 해넘이휴게소 근처에서 만날 수 있다. 이어 해가 지고 밤하늘에서 별빛이 쏟아질 때쯤 멀리 군산에서 김제를 거쳐 부안에 이르는 해안마을의 불빛이 밤하늘의 별이 내려앉은 듯 안온한 풍경을 그린다.
그리고 고난의 행군을 끝내는 순간 어느새 욕망을 버리고 너그러워진 자신의 마음을 만나게 된다.
군산=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