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원년 개막전 주심 김광철 대한야구협회 이사 “초창기 팬들, 돌 던지며 판정 항의… 폭동 수준”

입력 2011-04-05 17:48


1982년 3월 27일 오후 2시 30분 서울운동장(후에 동대문 운동장으로 불림). 일찌감치 매진된 티켓을 구입한 3만여 관중이 들어찬 가운데 마운드 위에 MBC 청룡 이길환, 타석에는 삼성 라이온즈 천보성이 잔뜩 투수를 노려보고 있는 가운데 김광철 주심의 ‘플레이 볼’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올해로 서른 번째 시즌을 맞는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만 29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개막전 주심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긴다는 김광철(63) 대한야구협회 이사를 올 시즌 프로야구 개막 하루 전인 지난 1일 서울 도곡동 야구회관에서 만났다.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은 숱한 1호 기록들을 남겼다. 안타, 홈런, 타점, 포볼, 삼진, 실책, 병살타 등이 1호로 프로야구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10회말 7-7 동점 상황에서 터진 MBC 이종도의 1호 끝내기 만루홈런이었다. 개막 후 프로야구 흥행에 대한 장밋빛 전망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종도의 만루홈런에 힘입은 바가 컸다.

“프로 개막전을 뛰는 선수들의 자세가 굉장히 진지했었어요. 당시 최강 멤버로 이뤄졌던 삼성과 선수 겸 감독으로 뛰었던 백인천이 맞부딪친 경기가 그렇게 극적으로 마무리되는 걸 보니 흥행 가능성이 충분히 있겠구나 싶었죠”

개막전은 명승부로 끝났지만 ‘플레이 볼’을 선언하기까지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시구를 하면서 대통령 경호실에서 개막전 주심들을 밀착 감시했다. 개막 일주일전 주심 통보를 받았던 김 이사에게도 경호실 직원들이 밤낮으로 따라붙었다. 개막일 전날에는 부담감 때문에 잠도 오지 않았다.

“경호원들이 계속 저를 따라다니니까 자연스럽게 술을 같이 마시기도 하고 그랬어요. 개막전 당일까지 검문을 엄중하게 하는 바람에 심판 대기실을 자유롭게 오갈 수 없을 정도였죠. 전 대통령이 시구할 때도 15도 각도로 3m 떨어져 있으라고 해서 그 거리를 유지했던 기억이 나요”

시구와 관련한 에피소드도 공개했다. “전 대통령이 처음 공을 던졌는데, 원 바운드 땅볼로 흘러갔어요. 그러니까 전 대통령이 ‘한 번 더 던져도 돼?’라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그러시라고 했죠. 두 번째 던진 공은 포수 쪽으로 정확하게 들어갔어요”

당시 프로야구 원년 심판은 김 이사를 포함해 모두 9명이 선발됐다. 아마 야구 심판 중 9명을 선발해 미국 심판학교에서 3주간의 교육을 받게 한 후 국내에서 2주간 추가 훈련을 실시하고 나서 경기에 투입됐다. 지금보다 경기 수가 적긴 했지만 매일 전국을 돌아다니는 생활이 이어졌다.

“9명이 거의 매일 이동하면서 경기를 치르다 보니 잠자리나 컨디션 조절하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가족들과도 함께 생활하는 일이 거의 없었고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심판 판정에 대한 불만은 심판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특히 팬들의 경우 심판 판정에 대한 불만이 때로 폭동수준의 반발로 이어지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1982년인가 그 다음해인가 정확하지 않은데, 내가 삼성하고 OB 경기 주심을 자주 봤어요. 그 중 하나인데 삼성이 앞서고 있던 9회초 투 스트라이크 원 볼 상황에서 삼성 황규봉이 던진 변화구를 볼로 판정한 다음 OB가 경기를 뒤집어 삼성이 졌어요. 대구 홈구장이었는데, 팬들이 돌 던지고 항의해 입구로 도저히 나갈 수 없어 외야 담을 넘어서 나갔던 적이 있었어요”

심판 판정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인데 선수에 따라 판정을 달리한 적은 없었는지 물었다. “심판들도 선수 출신이다 보니 고참 선수들 중에는 선수생활을 같이 한 선수가 있었어요. 나중에는 안 그랬지만 초창기에는 그 선수들 타석에 들어설 때는 스트라이크 존 적용하면서 어느 정도 배려를 해줬던 거 같아요”

오심에 대한 아픈 기억도 빼놓을 수 없었다. 김 이사는 아마추어 게임을 포함해 2800여 경기의 주심을 봤지만 만족하게 심판을 봤다고 자신할 수 있는 경기는 한 두 경기에 불과하다고 말할 정도로 심판을 보는 것이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옳다고 생각하고 내린 판정이 오심으로 드러나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창피해했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공을 끝까지 보지 않고 선입견 때문에 오심을 한 경우들이 있었어요. 한번은 롯데하고 LG 게임 3루심을 봤었는데 발이 빨랐던 LG 김재박이 3루로 여유있게 들어오는 줄 알고 세이프판정을 했는데 김재박 발이 롯데 3루수 김용희 글러브 위에 있는 거예요. 어찌나 부끄럽던지 얼굴이 화끈거리더라고요”

질병이나 부상을 당하지 않는 이상 교체될 수 없는 심판의 특성상 그라운드를 떠나지 못해 겪었던 낭패도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경기에 돌입하면 3∼4시간은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용변 문제는 심판의 가장 큰 적 중 하나였다. 경기 시작 전 최대한 대비를 하지만 피치 못하는 사고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부산 구덕야구장에서 경기할 때인데 어느 날은 7회부터 갑자기 배가 아픈 거예요. 그래서 포수한테 ‘나 지금 환장하겠다. 빨리 좀 진행해라’고 재촉했는데도 경기가 빨리 안 끝나 선 상태로 그만 실수를 한 적이 있어요. 경기 끝나자마자 화장실에서 바지부터 빨았죠”

원년 개막전 주심을 맡은 김 이사는 프로야구 928경기에서 심판으로 활약한 후 1990년 1월 12일부터 6년 9개월여 동안 심판위원장직을 수행했다. 1996년 현역에서 물러난 후 프로야구 해설가로 활약하기도 했던 김 이사는 2009년 11월 문을 연 심판학교 초대 주임교수이자 학교장을 맡고 있다.

“경기장 안에서 남을 심판하는 일은 프로야구 초창기나 지금이나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 심판들은 저희 때보다 기술적으로 굉장히 뛰어난 편인데도 항상 판정에 대한 시비들이 나오는 걸 보면 안타깝습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죠. 그래도 후배들에게 항상 시빗거리가 생기지 않도록 되도록 좋은 위치에 서라고 주문합니다. 자기가 누구보다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위치에 서있으면 누가 와서 항의해도 당당한 거죠”

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