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손수호] 종이의 운명
입력 2011-04-05 17:32
시인과 영화감독의 교유가 즐겁다. 신달자 시인이 펴낸 새 시집의 제목은 ‘종이’다. 임권택 감독이 만든 새 영화는 ‘달빛 길어 올리기’다. 두 작품이 만나는 지점은 종이. 영화를 찍던 감독이 시인에게 전화했다. “한지가 무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의 가장 좋은 정신이지요.” 시인의 대답은 영화 대사에 들어갔다.
시집에도 영화를 인용했다. ‘도서관’에선 “종이가 사라진다는 오해가 있었다면, 앓는 종이여! 미안하다, 네 신음 소리에서 달빛 길어 올려, 내 입술을 축이겠다.” 한지는 이렇게 묘사했다. “저 허공의 질감, 연한 몸빛의 달빛 지나고, 연한 쑥물 봄바람 지나고, 그 다음에 늘씬하게 두들겨 태어나려 태어나는….” ‘종이책’을 두고는 “제 몸을 헐어 정신의 날을 가는 숫돌의 힘”이라고 노래했다.
시인이 시집을 마음에 품은 것은 7년 전이라고 한다. 언론에서 종이의 죽음과 관련한 풍문이 많이 나돌 시점이었다. 그는 덜컥 겁이 났다. 시인에게 종이의 죽음은 책의 죽음이며, 책이 죽으면 인간의 소중한 가치 또한 소멸하고 말 것이라는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부터 종이만 생각하며, 종이를 위해 시를 썼다.
시집에는 시인이 각주를 단 ‘인간 나비’가 나온다. 무대는 캘리포니아 북부 연안 레드우드. 주인공은 당시 25세 아가씨 줄리아 버터플라이 힐(Julia Butterfly Hill)이다. 그녀는 600년 수령의 삼나무 ‘루나’를 살리기 위해 1997년 12월 10일부터 99년 12월 18일까지 높이 55m의 나무 위에서 버텼다. 거기서 먹고 놀고 잠잤다. 벌목회사가 경적을 울려대고, 헬기를 띄워 거대한 바람을 일으켜도 굴하지 않았다. 결국 정부와 시민단체가 힘을 합쳐 루나에 대한 보존 결정을 내리자 738일 만에 나무에서 내려왔다. 이때의 경험을 적은 책이 ‘나무 위의 여자’다.
시집 읽기에 열중할 무렵 이메일 하나가 날아왔다. “책 제본 부분을 절단한 뒤 스캔하면 PDF파일로 변환해 스마트폰, 아이패드 등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밑줄긋기, 광마크, 책갈피, 메모 기능도 있습니다. 스캔 비용은 1면 당 10원입니다.” 말미에는 ‘5년 내에 종이는 사라진다!’는 니콜라스 네그로폰테의 말을 부적처럼 붙여 놓았다.
종이는 정녕 우리 시대의 천덕꾸러기인가. 새로운 문명은 꼭 종이의 무덤 위에서 꽃을 피우나. 종이와 디지털의 공존은 어색하고 불편할 뿐인가. 시인과 영화감독은 시방 이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고 있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