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EU FTA 협정문 오류 파장… ‘자회사’→‘현지법인’ 번역 무역분쟁 소지 다분
입력 2011-04-04 18:19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협정문 한글본의 번역 오류는 어처구니없는 착오에서부터 중대한 실수까지 다양했다. 앞으로 무역 분쟁을 불러올 수 있는 치명적 누락도 있었다.
김종훈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은 30분 남짓한 기자회견 동안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외교부가 비준절차를 밟고 있는 한·미 FTA, 한·페루 FTA 협정문의 한글본에까지 불안한 시선이 드리워지고 있다.
번역 오류 사태는 정부가 지난 2월 국회에 제출한 비준동의안에 원산지 인정 기준(한국산 또는 EU산으로 인정받기 위한 역외 재료허용 비율)을 잘못 기재하면서 시작됐다. 두 번째로 국회에 제출한 비준동의안을 놓고도 논란이 가시지 않자 외교부는 지난달 10일부터 20일 동안 일반인·전문가 의견 접수와 재검독 과정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숨어 있던 오류가 무더기로 튀어나왔다.
오류를 유형별로 분류하면 잘못된 번역이 128건으로 가장 많았다. 자회사(subsidiary)를 현지법인으로 번역하는 등 협정이 발효된 뒤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충분했다. 특히 EU 측 상품 양허표는 동일한 유형의 오류가 반복해서 나타나 아예 새 양허표로 대체하기까지 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에서 제기한 사항도 상당부분 맞는 지적으로 드러났다. 모든 이해관계(any interest), 모든 조치(any measures) 등 법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any’를 번역하지 않은 것이 대표적이다.
2009년 11월 협정문 한글본을 공개하고 1년4개월이 지나도록 정부는 ‘치명적 오류’를 몰랐다. 김 본부장은 “오랜 시간 동안 일반에 협정문을 공개했기 때문에 어지간히 볼 사람은 다 봤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 나온 지적을 반영해서 수정하면 되는 걸로 판단했다”고 했다.
외교부는 협정문을 번역하고 오류를 짚어낼 전담조직이 없어 문제가 발생했다고 토로했다. 2009년 7월 타결한 뒤 4개월 동안 협상 담당직원들이 다른 FTA 협상을 하면서 동시에 한·EU FTA 협정문을 번역했다. 여기에다 기술적 검증이 필요한 상품·서비스 양허표, 품목별 원산지 규정은 외부 전문기관의 검증조차 받지 못했다.
잇따른 협정문 번역 오류로 한·EU FTA의 앞길은 어둡다. 양측이 합의한 7월 1일이라는 발효시점까지 국회에서 비준동의 절차를 마칠지도 불투명하다. 이달 임시국회에서 비준동의안이 통과해야만 국내법 개정작업을 거칠 수 있는데 시간도 촉박하다. 야당은 “제대로 된 검증작업 없이 이달 국회에서 통과시키면 오히려 국익을 해칠 수 있다”며 국회 차원의 한글본 검증위원회를 구성하자고 나섰다.
민변 송기호 변호사는 “국민생활과 우리 경제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제대로 검증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6일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번역 시스템 문제와 FTA 협정 내용을 조목조목 비판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찬희 조민영 기자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