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자
입력 2011-04-04 17:38
요한복음 4장 46~54절
성경을 읽을 때 ‘어떻게’는 방법을 묻는 과학적인 접근입니다. ‘왜’는 의미를 묻는 신앙적인 접근입니다. 그러나 ‘어떻게’도 중요합니다. 허균이 쓴 ‘홍길동전’을 읽으면서 “홍길동이 동시에 전라도에서도 나타났고, 경상도와 충청도에도 나타났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쌍둥이인가, 축지법을 썼는가”하고 따진다면 주제는 흐려집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장소가 다른데도 예수님은 어떻게 왕의 신하 아들의 병을 고칠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면 초점이 흐려집니다. 왜 요한복음은 이 사건을 소개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성경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경대로 살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암보다 무서운 것은 ‘불신’이라는 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영적인 질병,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영적인 질병은 암보다 무섭습니다. 암은 육신만 죽일 수 있으나 불신은 육신과 영혼을 함께 죽입니다. 본문에서는 두 가지 이적이 일어납니다. 죽어가고 있는 아들의 질병을 고치는 이적과 불신으로 가득 찬 아버지의 영적 질병을 고치는 이적입니다.
삶의 가시는 나를 빚어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입니다. 본문에서 왕의 신하의 정확한 지위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갈릴리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BC 4∼AD 39)의 고위 관리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 고관이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34㎞를 달려와 갈릴리 목수인 예수님 앞에 선 것은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함입니다. 아들의 죽어가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봐야만 하는 아비의 심정을 헤아려보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만남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인데, 고난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면 고난은 불행이 아니라 행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담대하게 “삶의 가시는 하나님이 나를 빚어 만드시려는 축복의 도구”라고 선언합니다.
내 마음의 불신이 항상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왕의 신하가 아들 때문에 찾아오긴 했지만 마음속에 불신이 가득 차 있음을 보셨습니다. 그가 아들의 육신의 병보다 더 무서운 마음의 병에 걸려 있음을 보시고 영적 상태를 질타하셨습니다. 먼저 고쳐야 할 것은 죽어가는 자식의 육체적인 병이 아니라 고관 자신의 영적인 불신의 병이었습니다.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나약해지고 근심하는 것은 문제가 크기 때문이 아니라 불신앙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불신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왕의 신하는 깊은 불신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소원은, 열망은, 엄청난 고민은 있지만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습니다. 49절에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생명이 붙어 있을 때 조치를 취해 달라는 것이지요. 죽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도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눈을 갖는 것입니다.
믿음이 변화를 일으킵니다. 예수님의 이적에는 항상 대상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전제됩니다. 예수님은 이적을 일으키기 전에 “낫고자 하느냐?” “나을 줄 믿느냐?”라고 꼭 물으십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분을 신뢰하고 있느냐는 확인입니다. 삶의 가시는 하나님이 나를 빚어 만드시려는 축복의 도구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육체의 질병과 영혼의 질병을 고칠 수 있는 구원자입니다. 십자가는 절대 긍정, 절대 희망의 상징입니다.
김진홍 목사(우이감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