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찬영 (2) 오늘 나를 만든 건 할머니의 신앙 유산
입력 2011-04-04 17:41
선교사는 나에게 숙명적인 단어처럼 느껴진다. 우리 가족에게 친할머니는 신앙의 조상이다. 할머니는 1900년대 초 아들(내 아버지)이 아홉 살 되던 해, 한 서양 선교사의 전도로 믿음생활을 시작하셨다.
“어서 오십시오. 차암 반갑습네다야.”
훤칠한 서양 선교사가 할머니를 친절하게 맞아주면서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서양식 발음이 익숙지 않아 생소했지만 마음만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하나님인가 하는 분이 그렇게도 용하시다면서요. ‘야소(耶蘇)교인’들이 말하는 하나님이 정말 우리 아이 병도 고칠 수 있나요?”
당시 내 아버지는 중병을 앓아 거의 죽게 되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백방으로 아들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할 수 있는 일은 다해 보았지만 별 차도가 없었다. 눈물과 한숨으로 밤을 지새우던 중 할머니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가장 능력 많으신 분, 하나님을 전하는 선교사가 있다는 거였다.
“무당이 하는 것처럼 굿을 할 필요는 없습네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병든 아이도 나을 수 있습네다. 우리 같이 기도하십세다.”
할머니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선교사를 따라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간절한 기도에는 응답이라는 선물이 있다. 선교사와 할머니의 기도 후 아버지의 병은 급속도로 호전돼 갔다. 짙은 어두움 가운데 밝은 빛을 본 할머니는 집안 내 우상 단지는 물론 집 앞에 있는 서낭당도 없애버렸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했소.” 소스라치게 놀란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물으셨다.
“제가 했어요.”
“뭐라고. 제정신이요. 귀신이 우리에게 복수해 올 텐데.”
“야소교를 믿어야 삽니다.”
할아버지는 아내가 서양종교에 미쳐 있다고 생각하니 암담해졌다. 어느 날에는 할머니에게 칼을 들이대고 교회를 가지 못하게 했다. “남편 말을 무시하니, 아예 없애버리겠소.” 할머니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내 희망은 죽어 천당에 가는 것인데,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며 당돌하게 맞받아쳤다. 이후 할머니는 남편과 갈등 속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고 결국 남편을 장로로 만들었다.
인생에 있어서 만일이란 가설은 그다지 의미가 없겠지만 할머니의 신앙 유산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내가 있을까 아찔한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내가 두 살 때 고향을 떠나 중국 안동 지방으로 이주했다. 당시 안동에는 훌륭한 목사님이 많았다. 특히 아버지가 장로로 봉사하셨던 육도교회에는 방계성 목사님이 당시 전도사로 봉직하고 계셨다. 방 목사님은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시다가 오랜 세월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 해방과 더불어 풀려난 그는 공산 치하에서 다시 투옥되고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
민족의식이 투철한 방 목사님의 지도 하에 신앙생활을 한 아버지의 나라 사랑은 남달랐다. 당시 일본군의 영향권에 있던 중국의 일부 지역에서도 창씨개명이 강요됐다. “사람은 부모를 바꿀 수 없듯이 성씨와 이름을 바꿀 수 없단다.” 아버지는 창씨개명과 관련해 나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런 연유로 난 학교에서 곤욕을 치르기 일쑤였다. ‘최’라는 한국 성을 고집하는 사람은 우리 학교에 나 혼자였기 때문이다. 모태신앙인이었지만 나는 아직 어린 터라 민족의식이 확고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다르게 취급받는 게 싫었다. 그러면서 사춘기가 찾아왔고 인생에 대한 고민과 방황이 시작됐다. 신앙에 대한 의문과 미래에 대한 걱정도 생겨났다. 그때 교회에서 대부흥사경회가 열렸다.
정리=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