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기업들 ‘후원’ 준조세] "도내 행사티켓 강제할당"… 어느 지자체 공무원의 하소연

입력 2011-04-03 21:28


“올해는 몇 장이나 팔아야 쓸까 모르겄네. 인자 승진할라믄 국·과장헌티도 잘 보여야 될턴디….”

오는 10월 전남 영암에서 열리는 포뮬러원(F1) 코리아 그랑프리 대회를 앞두고 전남도에 근무하는 공무원 A씨가 내뱉은 넋두리다. F1 대회 개막 180일을 앞둔 3일 광주의 한 예식장에서 만난 A씨는 모처럼 마주한 친척과 친구에게 연신 티켓 구매 의사를 타진했다.

“대회 조직위가 반값으로 할인 판매한 표가 모두 매진됐다는데, 표를 팔 걱정 안 해도 되는 것 아닌가”하고 되물었다.

“모르는 소리 하덜 마소. 지난해에도 거시기(F1대회)가 열리기 보름 전쯤엔가 표를 뭉텅이로 갖다 앵기드만. 나가 팔자에도 없는 앵벌이짓을 또 하게 생겼구만.”

F1 대회 조직위원회는 지난 28일 조기 구매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1만장 한정 50% 할인 행사가 당초 계획보다 이틀 빨리 완료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대회가 열리는 영암군은 물론 전남도청 공무원들은 입장권을 어떻게 팔아야 할지 걱정이 앞선다. 지난해 전남도가 도내 시·군 22곳에 1억∼2억원씩 입장권을 판매하도록 강제 할당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평소 알고 지내던 기업체 사장과 임원들에게 표를 사달라고 미리 부탁하는 공무원도 적지 않다는 후문이다. 개막일이 다가올수록 표를 사줄 수 있는 사람이 줄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정은 A씨의 경우에 국한된 게 아니다. 재정이 어려운 지방자치단체들이 무리하게 사업을 벌이면서 공무원과 기업이 서로 공생하는 ‘악어와 악어새’ 관계를 조장하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인천시는 지난 2월 자치구·군에 적십자회비 모금을 독려하는 취지의 공문을 보내고 모금 실적이 저조한 읍·면·동 10여곳을 골라 현장 점검에 나섰다.

이들 기초자치단체들은 동별 납부현황표를 만들어 일일 납부액을 수시로 체크했다. 일선 읍·면·동장들은 실적을 채우기 위해 관내 사업장을 돌며 수십만원씩의 특별회비 납부를 독촉했다. 한 동장은 “실적이 나쁘면 능력 없는 동장으로 찍히게 되기 때문에 관내 큰 기업체 등에 압력을 가해서라도 목표를 달성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 충북 제천에서는 한 소방관이 ‘제천국제한방바이오 엑스포 티켓 판매를 강매하지 말라는 내용의 글을 소방발전협의회 홈페이지에 올렸다가 “공무원법상 복종 의무와 품위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해임됐다. 당시 엑스포 조직위원회는 입장권 20만장을 충북도에 할당했고, 도는 그 가운데 절반을 각 시·군에 배분해 판매하도록 떠넘겼다.

대구시는 지난 2월 2011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입장권 50만장 중 26%밖에 팔지 못했다며 각 구·군청에 협조를 요청했다. 겉으로는 자율 구매였으나 강제 할당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중구 공무원들이 532장, 동구 675장, 서구 913장, 남구 533장, 북구 212장, 수성구 1500장, 달서구 922장, 달성군 655장의 입장권을 구입했다.

입장권 판매에 관여했던 모 구청 담당자는 “부서별로 자율적으로 신청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할당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느꼈다”며 “직원들이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구입을 종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과도한 후원금 모금은 기업들에 준조세나 마찬가지다. 행정지도 권한을 쥐고 있는 공무원한테 밉보일 경우 따라오는 후환이 두려워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 공무원들로서는 신세를 진 기업에 호의적이 될 수밖에 없다.

1995년 세계적 미술 축제인 광주비엔날레를 창설한 광주광역시는 열악한 지방 재정의 부담을 덜겠다는 명목으로 기업들로부터 대회가 열릴 때마다 수십억원의 후원금을 받고 있다. 광주은행의 후원금은 누적액으로 60억원이 넘었고, 현지 법인인 광주신세계백화점은 8차례 모두 12억5000만원을 건넸다.

강원랜드는 매년 각종 행사 협찬 요청에 시달리고 있다. 올 들어 지난 1일까지 접수된 것만 130건으로 하루 평균 1.4건 꼴이다. 강원랜드 관계자는 “일부 지자체는 사전 협의도 없이 축제나 행사, 대회를 만들어 놓고 예산이 없다며 무작정 협찬을 요구해 곤혹스러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고 말했다.



무안·인천·정선=이상일 정창교 정동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