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전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왔다… 가족의 비밀이 한꺼풀씩 벗겨진다
입력 2011-04-03 17:14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수많은 가족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재기에 성공한 가족도 있을 테고, 여전히 뿔뿔이 흩어져 생업전선에서 힘겹게 싸우는 가족도 있을 것이다. 상황이 어떻든 이들 대부분은 ‘외환위기’가 안긴 상처를 가슴속에 품고 살아갈 게다. 한 순간 나락으로 떨어졌던 처참한 경험을 잊는다는 게 쉽지 않을 테니까.
서울 서교동 산울림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내가 까마귀였을 때’(사진)는 외환위기 때 극한으로 내몰렸던 가족이 그 아픔을 치유해가는 내용을 담았다. 한 가족의 아픔을 통해 사회의 상처를 들여다본다.
자상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명문대를 다니는 딸과 건축 일을 하는 잘생긴 아들로 구성된 가족이 있다. 생활은 안정돼 있고, 집은 안락하다. 그런데 이 집 사람들은 부족한 게 없어 보이는데도 불안한 기색을 띠고 있다. 13년 전 ‘잃어버린’ 막내 때문이다. 막내를 되찾으면서 가족은 균열을 일으킨다. 막내는 “며칠은 굶어도 괜찮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할 정도로 어린시절 길거리를 떠돌며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남들이 자신과 함께 있으면 재수가 없다며 자기를 ‘까마귀’란 별명으로 불렀다고도 했다. 엄마는 막내의 옷에서 자꾸 이상한 냄새가 난다며 계속 방향제를 뿌려댄다. 18살이지만 이미 세상을 알아버린 막내를 가족은 감당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막내는 본성을 드러낸다. 가족을 향해 “나 빼고 잘 살고 있었느냐”며 “너희들이야말로 최고의 악질”이라고 패악을 부린다. 막내의 절규가 정점에 달하자, 그제서야 아빠는 눈물을 흘리며 비밀을 털어놓는다.
작가 고연옥은 극 초반부터 등장인물들의 수수께끼 같은 대사를 통해서 비밀과 관련된 단서를 도처에 뿌려놓는다. 처음 들었을 때 머리에는 남지만 명쾌하게 이해되지 않는 대사들은 가족의 비밀이 드러나면서 한 순간에 해독된다. 예컨대 “자기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만큼 위험한 건 없다”는 첫째(딸)의 외침은 가족이 묻어둔 아픈 상처를 모른척한 자신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엄마가 막내를 향해 “우린 널 기다렸어. 네가 우릴 다시 살게 했다”라고 호소하며 쏟은 눈물의 의미 또한 결말에 다다라서야 마음에 와 닿는다.
연극의 배경은 거실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행동은 소파에 앉아서 대화하는 것에 한정돼 있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장면들이지만 적절한 긴장감이 유지되는 데는 고인배, 손봉숙, 서은경 등 관록의 연기자들 덕분이다. 이들은 표정과 대사만으로도 파란만장한 가족사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지난달 29일 첫 막을 올린 공연은 5월 8일까지 이어진다.
이선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