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독교 성지 순례] 반성없는 일본…제암리는 아직도 슬프다

입력 2011-04-03 17:45


(5)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지

3·1만세운동은 종교적으로 거룩한 독립투쟁이었다. 당시 인구의 10%가 참여했다.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이었다. 특히 서울을 중심으로 한 시위가 그랬다. 호전적이고 폭압적인 일제에 맞서 나라를 되찾겠다는 수단으로서는 너무나 순수하고 온건한 방식이었다. 이 점은 3·1운동의 큰 자랑거리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이 운동은 애초부터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왜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를 안타까워했을까.

3·1운동 보기 드물게 혁명적

그러나 제암리와 수초리 등 경기도 화성시 일대 만세운동은 달랐다. 처음부터 매우 공격적이었으며 혁명적으로 전개됐다. 단순히 평화적으로 만세만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주재소와 우편소 등 일제의 하부 통치기관을 목표로 삼았다.

일제는 이러한 화성 지역의 항쟁에 대해 더욱더 폭력적이고 보복적인 진압작전을 썼다. 마치 토벌작전을 펴듯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기독교인이었다. 제암리교회는 1905년 제암리 사람인 안종후가 아펜젤러 전도사의 전도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됐다. 이 무렵 감리교 교회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안종후와 함께 꼭 기억해야 할 제암리의 기독교 지도자가 홍원식이다. 그는 구한말 군인 출신으로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로 해산된 후 여러 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독립투사였다. 후에 고향인 제암리에 정착한 그는 서재를 세워 아이들에게 교육을 시키는 등 농촌 계몽운동을 통한 애국 운동에 앞장섰다.

6년 뒤에는 교인이 늘어나자 8칸짜리 초가 예배당을 마련했다. 이 예배당은 김교철, 동석기 등 인근의 수초리교회와 남양교회 목회자들이 순회하면서 교회를 돌보았다.

기미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주위 교육을 받은 교인들이 3월 15일부터 밤마다 뒷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며 시위를 벌였다. 3월 말에는 발안 장터에서 시위가 이어졌다. 이날 시위 과정에서 일본 헌병과 주민들이 충돌한 것이 도화선이 됐다. 시위는 4월에 들어서서도 계속됐다. 일본군은 4월 15일 아리타 도시오 중위가 이끄는 1개 소대 병력 30여명을 파견했다. 제암리교회 예배당으로 교인들을 강제로 모아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평온한 농촌 마을 예배당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당시 잔인한 일본 군인들은 교인들이 교회 안에 갇혀 타 죽으면서도 어린아이들을 교회 밖으로 내보내자 그 아이들을 칼로 찔러 죽이기까지 하는 악행을 저질렀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아야

이 학살극에서 안종후와 홍원식을 비롯해 마을의 남자 대부분이 피살당하고 이를 보고 달려 나온 부녀자까지 희생됐다. 총 23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고 마을 전체가 불에 탄 끔찍한 참극이었다. 사망자 절반 이상이 크리스천이었다.

이 끔찍한 현장을 세계에 알린 이들은 외국 선교사들이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4월 16일 당시에 영국 대사인 커티스와 함께 와서 현장을 확인하고 미국 선교부에 보고했다. 그의 보고서는 미국기독교연합회가 편찬한 3·1운동 진상보고서에 실려 국제 사회에 알려졌다.

제암리 사건과 관련해서 역사적으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스코필드 선교사다. 그는 사건 직후 제암리를 방문해 사진을 찍고 현장을 조사해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보고서를 썼다. 이 밖에 일제의 만행을 조사하도록 미국 영사관에 압력을 행사한 당시 감리교 수원지방 감리사 노블. 사건을 기사화해 일본 현지에 알린 프리랜서 기자 테일러 등도 기억해야 할 인물들이다.

그러나 정작 국내에서는 해방이 되고 나서도 오랫동안 망각 속에 묻혀 있었다. 사건 발생 60여년이 흐른 1982년에 숭고한 애국 혼으로 되살아났다. 당시의 생존자 고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에 의해서다. 전 할머니는 22인과 함께 순교한 안진순의 아내다. 그의 증언에 따라 임시로 묻혀 있던 유골을 수습해 제암리교회 뒷동산에 이장하고 엄숙한 합장묘역으로 조성했다.

이어 2011년에는 제암리교회를 현대식 건물로 새롭게 건축했다. 화성군은 같은 건물에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을 세웠다. 뒷동산에 합장묘역도 마련했다. 교육관과 미래를 상징하는 조각물(꼭대기 부분 ○ 모양), 3·1운동 순국기념비 등을 세워 쾌적하고 널찍한 공원을 만들었다. 교회 일대는 국가 사적 제299호에 지정됐다.

2층 건물로 조성된 기념관은 시청각교육실을 포함한 3개의 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제1전시실은 제암리 사건의 배경과 발단에서 전개 및 의의에 이르기까지 전말을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제2전시실은 3·1운동 전체에 대해 8가지 주제로 짜임새 있게 전시하고 있다.

기념관에 있는 시인 박목월의 추모시가 관람객의 눈길을 끈다. ‘나라를 잃으면 신앙도 교회도 지키기 어렵다’는 메시지다. 기념관을 나와 오른쪽으로 향하면 제암리교회 예배당이 나온다. 170여명의 신자들은 매년 삼일절이 되면 순교자들의 희생을 기리는 예배를 드린다. 교회를 지키는 이는 강신범 목사다. 80년 첫 사역지가 제암리교회다. 제암리교회 역사를 제대로 살려냈지만 그는 굳이 생색을 내지 않았다. 내년 이맘때 은퇴하는 강 목사는 “기념관만 둘러보고 교회를 찾지 않는 이들이 많아 안타깝다”면서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아야 한다’는 화해와 용서의 정신을 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화성=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