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1)/해방후 첫 선교사 최찬영 목사

입력 2011-04-03 17:24


[미션라이프] 내 나이 85세. 내 이력에는 유난히 최초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된다. ‘해방 후 첫 한국 선교사’ ‘아시아인 최초의 태국과 라오스 성서공회 총무’ ‘1978년부터 92년 은퇴할 때까지 아시아인 최초의 성서공회 아시아태평양지역 총무’ 등. 이 모두가 능력에 비해 분에 넘치는 광영이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난 부족한 사람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일생을 한 문장으로 축약하라면 이렇게 고백하고 싶다.

난 오랜 시간 외국에서 지내며 언어와 문화가 다른 곳에서 살아왔다. 고국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정도다. 하나님은 92년에 은퇴한 이 늙은이를 17년 만에 미국 LA또감사선교교회를 통해 또다시 선교사로 파송시켜주셨다. 그러니 난 예비역이 아닌 현역 선교사다. 전에 누군가 나에게 ‘다시 한번 인생을 살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이 되겠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다시 살 수는 없겠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선교사의 삶을 그대로 되풀이할 수만 있다면 또 그 길을 가겠다”고 했다. 크리스천에게 선교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문제는 특정한 사람만 선교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선입견이다. 또 선교사는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한다고 상상한다. 물론 이국땅에서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현지인들과 부대끼면서도 생각지 못한 위로와 격려가 있다. 역경(逆鏡)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천양지차다. 크리스천은 역경을 순경(順鏡)으로 반전시키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그럼, 본격적으로 내 얘기를 시작하려 한다. 아니 나를 이끄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섭리를 나누려 한다. 2009년 말 아내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다. 마치 연어의 귀향처럼.

“여보, 이제 우리 한국에 돌아가 살면 어때요? 동생 순명이네 가서 지내보니 한국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옛날 부산에서 환자를 돌보며 느꼈던 그런 향수가 남아있더라고요. 병원과 치료시설, 양로원 등 우리 같은 노인들이 지내기에도 모든 것이 편하게 잘 갖춰져 있어요.”

의사지만 선교사의 아내로 살아왔던 ‘내 사랑’, 김광명. 그는 항상 내 뜻을 존중해주었다. 일평생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은 내 몫이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아내가 먼저 고국행을 제안했다.

“후배 선교사들을 돕기 위해 베트남과 태국 등지를 돌아보고 2주 후에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 잘 생각해보구려. 이번에는 당신이 결정하시오. 기쁘게 당신의 뜻을 따르겠소.”

선교지 순방을 마치고 미국의 집에 돌아왔을 때 아내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인생의 마지막을 고향에서 보내고 싶다고 했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아내는 인생을 정리라도 하듯 아스라한 기억 속에 자리한 고국을 깊이 느끼고 싶었던 것 같았다. 난 어디에서 살아도 좋다고 생각해 왔다. 때문에 그동안 고국으로 돌아올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때마다 접었다. 모처럼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나는 이번 한국행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란 걸 확신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당부를 하시는 게 느껴졌다. “한국에서 여생을 아내와 함께 보내거라. 한국교회와 선교에 조금이라고 유익한 사람이 되어라. 내가 너를 인도할 것이다.” 정리=

◇최찬영 선교사=1926년 평양 출생. 장로회신학교 졸업. 5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선교사 파송. 태국과 라오스 성서공회 총무, 성서공회 아시아태평양 지역총무, 미국 풀러신학교 선교대학원 한국학부 교수 역임. 현재 미국 LA 또감사선교교회 선교사, GEDA인터내셔널 총재,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