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에게 위무 메시지 건넨다… 신달자 전작 시집 ‘종이’
입력 2011-04-01 17:55
시인들은 두루마리 화장지에다가도 시를 쓴다. 은박지 껌 종이 뒷면에 쓰기도 하고 담뱃갑에도 쓴다. 급하면 손바닥에도 쓴다. 하긴 몇 줄 안 되는 시를 컴퓨터 커서의 깜박임과 자판에 의지해 장황하게 써내려갈 시인이 어디 있겠는가. 그만큼 종이는 시인과 근친관계에 있다.
아날로그의 상징이기도 한 종이를 주제로 전작 시집 ‘종이’(민음사)를 낸 시인이 있다. 신달자(68) 시인은 이 시집을 7년 전부터 마음에 품었다고 한다. 종이책은 수명이 다했다는 풍문이 나돌면서부터다. 종이가 사라진다는 목소리가 커져 갔다. 종이가 죽었다는 말도 나왔다. 마음이 급해졌다. 그에게 종이의 죽음은 시 정신의 죽음처럼 다가왔다.
시집엔 나무(자연)에게서 태어나 인간 감수성의 나이테를 고스란히 간직해 줄 것만 같은 종이에게 바치는 헌시 76편이 담겼다. “입소문이 파다하다/종이가 사라진다고?//그래서 빈 들에 나갔지 추수 끝난 뒤에 헛헛한 들을 달래고 있는 적막 한 페이지/그래서 숲 속 작은 골목길로 나갔지 나뭇잎들이 수군거리는 말 새들이 단정히/문장 만들어 자작곡을 붙이는 작은 연주회”(‘서시’ 부분)
문명의 이기로 출발한 종이는 수천 년 동안 인간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인간의 욕망과 희열, 비통을 품은 인간 정신 자체가 되었다. 파피루스, 대나무 조각, 비단, 양피지에 이르기까지 기록 매체는 다양했다. “그래서 그러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인류는 종이를 만들어 냈다/(중략)/종이에게 절하라/칭기스칸이 침략을 위해 지나갔던 길 위로 종이도 침략보다 강하게 지나갔던 것이다. 페이퍼 로드다, 영혼의 길.”(‘페이퍼 로드’ 부분)
시집에서 모든 사물은 종이로 수렴된다. 여름 나뭇잎은 바탕이 너무 진해서 붓을 밀어내는 ‘진초록 종이’이고 파도는 마구잡이로 구겨 놓아도 다시 일어서고야 마는 ‘푸른 종이’이고 폭설은 지상의 점은 종이를 덮어 버리는 하얀 순은의 ‘종이’이다.
신달자에게 ‘종이’는 여성성을 확인해준 첫 손길이기도 했다. “나 어린 처녀 때/가랑이에서 물컹 살점 떨어지는 기미 있었는데/“꽃 비치는 기라, 말라거래이”/어머니 일러두었건만/아무리 생각해도 꽃은 아닌 것 같아/문 걸어 잠그고 나 그걸 종이에 묻혀 보았는데/살점도 아니고 붉은 피도 아니고/꽃은 더욱 아니었는데”(‘꽃 비친다 하였으나’ 부분)
그뿐 아니다. 종이에는 인간의 모든 역사가 스민다. 아기가 태어나면 이름을 지어 호적에 올리는 일에서부터 사망하면 호적에 붉은 줄이 그어지는 일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죽살이가 종이 위에 기록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양푼에 담긴 쌀 위에도 글자를 썼다 소리가 들렸다/동네 제재소 톱밥 위에도 글자를 썼다 소리를 먹었다/(중략)/6·25 때 전사한 오빠의 유골/그 따뜻한 재 위로도 글자를 썼는데/위잉 손끝이 얼얼했다/어디다 쓰면 배가 부를까/스무 살 오빠의 나물 소쿠리만 한 무덤마저/다 내 공책이었던 맑았으나 맹한 촌 가시내 습작 이야기”(‘성장통’ 부분)
종이만 보면 무엇인가 써야만 한다는 강박이 오늘의 시인 신달자를 만들었던 것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숙명여대 재학 시절 시를 쓰고 싶어서 안달하던 이 예비 시인은 효창공원을 거닐다가 시상이 번뜩여 종이를 찾았으나 쪽지도 몽당연필도 주머니엔 없어서 엉겁결에 나뭇가지로 땅에다 새겨 넣은 뒤 집으로 달려가 종이와 연필을 가져왔으나 그 구절은 이미 지워진 뒤였다. “어느 나무 밑에도/내 시는 사라지고, 없고,/내 머릿속도 누가 깨끗이 털어가고/도무지 누가 들고 내뺐는지/아직도 나는 그 명구절을 찾지 못하고/방황, 불안증, 치명의 기다림, 불면이//그 시절부터 지병으로 왔는데/손등에 그은 손톱자국의 피로 갈긴 상형문자도/그때 그 명구절을 가져오지 못하는데.”(‘번쩍 내 머리를 스치는’ 부분)
이처럼 ‘종이’는 잃어버린 명구절을 재발견하는 망각의 희미한 표면이기도 하다. 종이에 대한 사랑, 그것이 시인이 심는 최초의 씨앗이라고 신달자는 말하고 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