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이화련] 웃자고 한 이야기
입력 2011-03-31 17:43
외동딸을 시집보낸 어느 부부의 이야기다. 웃자고 하는 얘기라며 입을 열었다. 딸이 믿음직한 짝을 만나 가정을 이루게 돼 더 없이 기뻤지만 자주 볼 수 없을까 봐 걱정이었다고 한다. 공부하고 직장 다니느라 집안일이라곤 모르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생각 끝에 신혼부부의 보금자리를 같은 아파트 단지에 꾸미도록 했다. 되도록 가깝게, 친정 바로 앞 동, 마주 보는 자리에 집을 구했다.
엎어지면 코 닿을 데 딸이 사니 누구보다 그 어머니가 마음이 놓였다. 틈틈이 살림을 들여다보고, 무슨 일이 생기면 달려가 도와주리라 마음먹었다. 딸과 사위도 가까이 사는 걸 불편해하지 않았다. 주말마다 놀러오고, 퇴근길에 신랑 각시 나란히 들르기도 했다. 결혼시키고 나면 자식들 얼굴 보기 쉽지 않다는데 적적할 사이 없이 찾아주니 반갑고 고마웠다.
덕분에 어머니는 솜씨 발휘할 기회가 늘었다. 사위에게 색다른 음식 해 먹이느라 재미가 났다. 사위는 특히 해산물 요리를 좋아한다는데 부부는 마침 수산시장 근처에서 작은 가게를 하고 있었다. 딸네 부부가 오는 날이면 일찍 문을 닫고 싱싱한 생선을 구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날이 그날 같던 집안에 활기가 돌고 다 늙은 부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일 년쯤 지나 아기가 태어나자 부러울 게 없는 기분이었다. 노부부의 귀가가 더욱 빨라지고, 쉬는 날이면 외손자 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안고 어르는 것만 아니라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일도 도맡았다. 젊은이들도 기꺼이 아이를 맡겼다. 주말이면 아예 어른들 집으로 퇴근했다. 처음엔 저녁만 먹고 일어났는데 점차 휴일 내내 머물게 되었다.
그들의 휴일은 정말 휴일다웠다. 밥 걱정 아이 걱정 없이 푹 쉬고, 마음 내키면 둘만의 외출도 오붓이 즐겼다. 어른들도 행복했다. 손님들과 부대끼다 들어와 젖내 달콤한 손자를 안으면, 이게 늦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또 일 년쯤 지났다. 그동안 가족들 사이는 더 가까워져 함께 지내는 날이 늘었다. 아이가 감기라도 걸리면 일주일 내내 같이 살 때도 있었다. 쑥쑥 크는 손자는 여전히 사랑스럽고, 해산물 요리를 좋아하는 사위도 여전히 반가웠다.
다만, 딸네 식구와 지내는 휴일보다 가게에서 보내는 날들이 더 휴일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일을 빨리 마치려고 서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많이 피곤한 저녁이면 아파트의 불을 늦도록 켜지 않았다. 그런 날은 텔레비전의 빛이 새나가지 않게 커튼을 쳐서 빈집처럼 만들었다. 그렇게 했어도 퇴근한 걸 알고 딸이 우는 아이를 안고 왔는데, 맞은편에서 보니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라고 했다.
요즘 그 부부는 종종 무릎걸음을 한다고 했다. 그저 쉬고 싶은 저녁, 차라도 한 잔 끓이려면 커튼에 그림자 지지 않게 무릎으로 기어 다닌다고 했다. 자식과 너무 가까이 살려고 하지 마라, 가깝게 살더라도 맞은 편 아파트만은 피해라. 그 부부가 웃으며 덧붙인 말이다. 살기 바쁜 세상에 자식이 부모를 자주 찾아주는 것만 해도 큰 효도인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가 보다.
이화련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