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故 박석원 상사 부친 박병규 목사 “보낸지 1년… 그립다 아들아!”
입력 2011-03-30 18:01
외동아들이었다. 목회자로서 신앙인으로서 담대하게 하늘의 뜻을 받아들인다는 그도 아들의 추모식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엔 애끊는 부정(父情)에 주저앉았다. 상자 안에 넣어둔 유품, 차마 펼쳐보지 못했던 아들의 일기며 기도수첩을 읽어 내려가다 터져 버린 슬픔. 참척(慘慽)이라 하지 않던가. 지난 25일, 딱 1년 전 천안함에서 전사한 박석원 상사(당시 중사)의 아버지 박병규(56) 목사를 만났다. 그날은 추모식 전날이었다. 찬바람이 불었다. 충남 아산터미널에 마중 나온 박 목사는 배방읍 자신의 집으로 안내했다. 인터뷰는 침묵과 절제된 언어를 오가며 장시간 이뤄졌다.
전도자 아들
박 목사는 거실수납장에서 임관 때 찍은 아들 사진과 무공훈장을 꺼내어 들었다.
“2002년 임관 때 찍은 사진이에요. 의무복무 48개월 마치고 연장 또 연장.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고 하니까 본인이. 그렇게 하다 지금까지 온 거죠.”
그러니까 8년 2개월이 지나서였다. 아들이 해군에 입대한 때가 2002년 1월 21일이다. 백석대 기독교학부를 1년 마치고 해군부사관 시험에 합격해 당당하게 군에 들어갔던 아들. “수영은 배웠느냐”는 물음에 “해군은 물에 빠지면 육군이 건져준대요”라며 여유 있게 웃어 보이던 아들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외아들이다 보니 금이야 옥이야 키웠다. 1982년 산아제한이 한창이던 해 아들 석원을 낳았다. 당시엔 하나만 낳아 기르면 이런 저런 혜택이 주어졌다. 요즘 셋 이상 출산하는 가정에 그러하듯이. 아들과 함께라면 어디라도 좋았다. 유치원 재롱잔치며 초등학교 운동회며 당시 스튜디오 촬영 일을 하던 박 목사는 어디든 카메라를 들고 따라갔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창밖을 하염없이 내다보며 아들을 기다리다가도 멀리서 아들이 뛰어오는 모습을 바라보면 안쓰러워했던 아내. 아들은 영원한 기쁨이고 소망이었다.
석원은 잘 자라주었다. 특히 신앙적으론 일찌감치 성숙했다.
“중학교 1학년 때 복음이 확실히 들어가서는 사춘기도 그냥 지나버렸어요.”
고민이라고 털어놓는다는 얘기가 어떻게 하면 전도를 더 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교회에 헌금을 더 많이 할 수 있을까였으니 부모 입장에선 때론 수위 조절을 시켜줘야 할 정도였다. 고등학생 때 몰래 신문배달을 해 번 돈으로 십일조, 감사헌금을 하다 된통 아버지에게 혼났던 일도 살아있다면 웃으며 말했을 아들이다.
아들은 생전 마지막 월급날에도 200만원 중 절반은 자신이 다니는 교회 헌금으로 나머지는 아버지 목회에 쓰시라며 내놓았다. 아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묵상하고 기도한 내용을 수첩에 적었다. 배 위에서도 섬에서도 마지막 숨을 거뒀던 기관부 침실에서도 자신의 기도를 적어 내려갔을 것이다. 주일 설교 내용도 모두 기록했다.
“2009년 1월 11일. 강하고 담대하게. 제목이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하느니라’네요. 주일날 사병들 앞에서 예배를 인도할 때 쓴 설교 원고에요. 이건 교회에서 들은 설교를 기록한 거고. 이 정도면 아아… 설교 원고로 써도 돼요. 몇 년을 할 수 있는 분량이에요.”
시신이 수습된 이후 해군에서 유품으로 보내온 물건이라곤 성경, 기도수첩, 전도핸드북, 복음편지 4권의 책뿐이었다.
“유품마저도 그렇더라고요. 세상 사람들 입장에선 별거 아닌데 아버지가 볼 때는. 목사인 아버지가 볼 때는 나보다도 낫다….”
살아남은 자의 몫
그 아들 보내던 날은 피격된 26일도 아니고 시신으로 마주한 4월 16일도 아니었다. 2010년 3월 29일, 혹시 모를 생존자를 위해 함미 틈새에 공기를 주입하던 날의 일이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우리 석원이를 살려주세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도하던 내외. 다시 기도하기를 “아이를 살려주시고 전도할 수 있게 해 주세요”라며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때 떠오른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 죽은 나사로를 살아있는 자들에게 보내달라는 부자의 부탁에 아브라함은 살아날지라도 그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더랬다.
“아아 하나님이 이 아이를 데려가셨구나. 죽은 자가 살아가도 안 믿는 사람은 안 믿는구나. 데려가셨구나. 그게 응답이었어요.”
한 번쯤은 하늘을 원망하지 않았을까. 박 목사가 말했다. “육신의 헤어짐은 애처롭지만 복음이 없다면 고통이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는 이겨낼 수 있을 만큼의 고난이지요. ‘왜 하필이면’이라는 말조차 해보지 않았습니다. 절대주권의 섭리. 섭리는 받아들이는 거지요.”
박 목사는 97년 개척한 천안 한빛교회의 목회 일을 잠시 내려놓았다. 후임자에게 교회를 부탁해두고 쉬면서 병원과 군, 국내외 선교지를 돌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
“아들 만나러 천국 가는 순간까지 복음 전하며 아들이 못다 한 일을 해야겠지요. 그리고 아내가 원해서 기도해보려고 합니다. 아이를 하나 데려다 키우면 좋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복음으로 기도로 잘 키우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지요. 쉬운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 나오는데 남상분(51) 사모가 손을 꼭 붙잡았다. “입양기관 좀 꼭 알아봐주세요.”
2010년 3월 21일 밤 10시2분, 박 목사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아들의 마지막 문자. ‘예. 아빠도 건강하시고 후대 키우는 언약을 꼭 잡으세요.’
아들아 건강하렴. 많이 보고 싶다.
■ 故 박석원 상사
박석원 상사는 2002년 5월 해군 부사관 192기, 병기하사로 임관 후 전남함, 참수리-337호정, 순천함 등을 거쳐 2009년 7월 20일 천안함으로 부임했다. 군 복무 중에는 27전대장, 순천함장 표창을 받았고, 포술장비에 대해 실질적인 정비를 실시해 최상의 포술장비 성능을 유지했다. 천안함에선 매사에 적극적이고 맡은 바 임무를 빈틈없이 수행하는 모범적인 군인이었다. 천안에서 태어나고 학교를 졸업해, 같은 이름을 가진 천안함에서 근무한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박 상사는 당직근무를 비롯해 포 정비, 사격훈련 등 모든 과업에 있어 솔선수범한 모범 군인이었고, 추운 밤이면 어김없이 함교 외부에서 견시를 서는 견시병을 위해 따뜻한 차를 타주는 자상한 부사관이었다(2010년 4월 15일 천안함 함미 기관부 침실에서 시신이 발견됐다는 국방부 발표 직후 보도된 내용).
글 이경선 기자·사진 이병주 기자 boky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