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기쁨 충만하게… 8년째 창작발레 ‘메시아’ 무대 이화여대 신은경 교수
입력 2011-03-30 18:01
발레 실에서 만난 ‘메시아’
“우물가 여인, 예수님이 손대기 전에 미리 벌떡 일어나지 말고. 손이 닿으면 떨리는 마음으로 일어나. 알았지.”
“스마일, 기쁨 충만해야 해.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한다, 자∼, 원 투, 에뽈레(한쪽 팔을 내민 기본 자세). 호산나 찬양소리가 들린다. 마리아, 원 투, 파 드 브레(종종 걸음 같은 스텝) 하면서 그대로 들어간다.”
지난 25일 오전 8시 서울 이화여대 발레연습실. 창작 발레 ‘메시아’ 연습이 한창이다. 예술감독과 안무를 맡고 있는 무용과 신은경(55) 교수가 연습실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왼손에 쥔 무선마이크를 통해 쉴 새 없이 이야기한다. 발레리나의 동작, 위치부터 등장인물의 심정까지. 특히 예수, 제자, 우물가 여인 등의 내면을 조근조근 설명했다.
‘메시아’는 사복음서의 예수를 헨델의 ‘메시아’곡을 바탕으로 창작한 발레 작품이다. 재학생과 졸업생들로 이뤄진 이화발레앙상블의 대표 레퍼토리다. 2003년 초연, 7년 동안 크고 작은 무대에 올랐다.
일주일에 4회, 오전 7시부터 1교시 수업전까지 연습한다. 이번에도 5월 7일 부활절 기념 무대를 위한 것이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서둘러 온 학생들이지만 표정도 몸놀림도 가볍다. 그 속에 진지함이 있다.
우물가의 여인을 만난 예수는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이를 기뻐하는 화려한 군무가 무대를 수놓는다. 그때 사탄은 유다를 유혹한다. 사탄의 표정과 손짓이 간교하기 이를 데 없다. 유다에게 속삭인다. 유다가 떨쳐내려 애를 쓴다. 하지만 떨어지지 않는다. 음흉한 미소의 사탄은 유다에게 귓속말로 속삭인다. 무대 한쪽에서 제자들은 졸고 있다.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한다.
통역이 필요 없는 몸짓 복음
2002년 12월 이화여대 총동창회 예배가 끝난 후였다. 한 동문이 이런 말을 했다. “헨델의 ‘메시아’같이 복음을 전하는 이화여대만의 특별한 문화 없을까.” 그러자 나온 의견이 “발레로 ‘메시아’를 해보면 어때요?”였다. 신 교수는 일단 알겠다고 말했다.
그는 누가 이야기를 꺼냈는지 기억도 안 난다고 했다. 하여튼 그게 ‘메시아’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8개월이 지나도록 진전이 전혀 없었다.
“총동창회는 기도하고 있다지,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지. 사복음서를 다시 통독하며 장면을 구상하는데 처음에는 꽉 막히더라고요. 그런데 학생들에게 ‘이렇게 해봐’ ‘이렇게 해봐’ 하는데 술술 풀리는 거 있죠. 나중에 보니까 구성도 딱 들어맞는 거예요.”
이렇게 4개월 만에 완성된 메시아는 2003년 12월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초연했다. 이후 연세대 대강당, 올림픽 체조경기장 등에서 공연했으며 미국 뉴욕, 뉴저지, 보스턴과 호주 시드니 등 해외 무대에도 올랐다. 최근에는 캄보디아 인도에서도 공연했다. 선교를 위해서다. 복음을 드러내기 어려워 ‘돌아온 탕자’와 ‘메시아’ 중 마지막 장면 ‘할렐루야’만 선보였다.
발레와 신앙은 신 교수 삶의 두 축이다. 그는 모태신앙으로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가 목회자였다. 지금은 은퇴한 엄명구 목사와 9살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한 것도 신앙 때문이었다. “목회자와 결혼하면 예수님의 울타리 속에서 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발레보다 신앙이 우선이었던 것 같아요. 목회자 사모가 되면 무대에 설수 없다고 다들 말렸는데도 결혼한 것을 보면요. 목회자 사모로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도 몰랐고요.” 신 교수는 결혼 후 1년 반 동안 발레를 그만뒀다가 복귀했다.
6살 때 안짱다리 무용 접하다
발레는 6살 때 시작했다. 엄마가 안짱다리를 고쳐주려고 그를 무용실에 데려갔다. 그 역시 발레가 좋았다. “늘 조용하고 소심했는데, 무용실에만 가면 그렇게 잘 뛰더래요.”
남편 내조하고 두 아이 키우고 강사 생활하면서도 무용이 큰 위로가 됐다. “그땐 너무 힘들었어요. 연년생 두 아이 입에 양손으로 젖병을 물리고 조는 것은 다반사였고요. 기저귀도 정리된 것을 쓰는 게 아니라 항상 빨랫줄에 있는 것을 걷어서 썼어요. 그만큼 바빴어요. 하지만 아름다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나면 모든 피로가 다 풀렸어요.”
이 진지한 발레리나에게 발레를 희화화한 KBS2 개그콘서트의 ‘발레리NO’에 대해 물었다. 역시나 본적이 없다고 했다. “학생들이 너무 재미있다고 한번 보라는데 그도 쉽지 않네요. 일부러 한번 볼게요.”
메시아는 관객뿐만 아니라 출연진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크리스천이 아니었던 학생이 예수를 영접했다. 더블 캐스팅돼 2년째 예수 역을 맡고 있는 현재 3학년 임지은 학생이 대표적인 경우다. “처음에는 작품에 대해 대화가 안 됐어요. 체포되기 전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짓는 예수의 복잡한 심정을 그렇게 많이 이야기해도 소화를 못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눈빛이 달라지고 몰입하는 게 보였어요. 알고 보니 몇 주 전부터 교회에 나가고 있더라고요.”
초연 때부터 함께 일했던 조명 감독은 공연 중에 예수를 만났다. “조명을 비추는데 예수님이 무대에서 자기를 바라보더래요. 지금은 목사 사모가 돼 캐나다에서 사역하고 있어요.”
올해 부활절에도 ‘메시아’ 무대에
이화여대 대강당이 무대다. 주제는 ‘희망을 여는 발레-메시아’. 일본 대지진, 리비아 사태 등 희망이 필요한 지역에 메시아를 전하자는 취지다. 입장권은 2만원이지만 무료에 가까운 수준이다. 그것도 수익금은 선교에 사용한다. 소년소녀가장, 새터민, 외국인 근로자, 조선족 등은 무료로 초청한다.
작품은 총 2막10장이다. 이날은 1막과 2막의 마지막 장면만 연습했다.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기본으로 하되 모차르트, 베를리오즈, 쇼스타코비치의 관현악곡이 극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발레는 음악을 타고 물 흐르듯 이어졌다. 그 안에 예수의 삶이, 복음이 담겼다. 작품은 종교적 뿐만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호평 받고 있다. 관객을 몰입시키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탁월하다는 평가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간격 잘 맞추고, 실제 무대는 이곳보다 크니까 조금 더 벌려 서고. 자 복음이 전해진다. 온 세계를 향해서. 기쁨이 충만하게….” 출연진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학생들은 앞뒤로 서서 두 손을 하늘로 향했다. 표정도 몸짓도 부활하신 예수를 찬양했다.
음악이 끝나자 신 교수, 학생 모두 박수를 쳤다. 유일하게 손님이었던 기자만 박수 타이밍을 놓쳤다. 예수가 부활한 골고다의 언덕에서 무용연습실로 돌아오는 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글 전병선 기자·사진 이병주 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