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 문턱서 난생 처음 찾은 예배당… ‘한국 첫 키스신’ 원로배우 윤인자 회심기

입력 2011-03-30 18:26


원로배우 윤인자(89)씨가 구순을 앞두고 신앙의 문턱을 넘었다. 윤씨는 지난 27일 오전 11시30분 난생 처음 교회를 찾았다. 서울 미아2동 길음성결교회였다. 교회가 생긴 이래 최고령 새 신자를 맞은 임세빈 목사는 ‘절망의 끝에서도 웃는 하나님’이란 주제로 설교했다.

임 목사가 다같이 한번 웃어보자고 했지만 모두 쑥스러워서인지 눈웃음만 보일 뿐이었다. 그러자 임 목사는 항상 호탕하게 웃는 최래옥(73·한양대 국문과 명예교수) 장로를 일으켜 세웠다. ‘하∼하∼하∼’ 원로 민속학자인 최 장로가 벌떡 일어나 예배당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크게 웃었다. 그제야 교인들도 웃음보를 풀었다. 최 장로의 부축을 받아 교회를 찾은 윤씨도 오랜만에 맘껏 웃었다. 윤씨는 선글라스를 끼고 하얀 베레모에 회색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범상치 않았다.

그녀는 이날 서울 수유동 다가구주택 지하 사글셋방에 돌아와서도 첫 예배의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지만 왕년의 스타로서 품위도 잃지 않았고 목소리는 카랑카랑했다. 윤씨는 내달 22일 89회 생일을 맞는다. 최 장로와 그의 지인들은 서울 대방동 해군회관에서 최근 출간된 ‘나는 대한의 꽃이었다’ 출판기념회를 겸한 ‘여배우 윤인자의 밤’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교회에 처음 가본 기분이 어떠셨어요.

“사실 어릴 때 크리스마스 때 가본 적이 있어요. 그때 성극을 하는 것을 봤어요.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시켜주지 않아서 섭섭하기도 했어요. 언젠가는 커서 나도 한번 저런 연극을 하고야 말겠다는 다짐도 했었지요.”

-예수를 믿을 생각은 언제부터 하셨나요.

“솔직히 말해 세상적인 즐거움에 빠져 살다보니 미처 생각을 못했어요. 매일 회개하는 것도 사실은 부담이 됐어요. 그러다 여기까지 온 거죠. 죽기 전에 항복하고 천국으로 가는 사람들도 많더라고요. 저도 이제 그런 행운을 누릴 것 같아 기분이 좋았어요. 저를 인도한 최 장로님께 감사하지요.”

-교회에 갔다 오시니 뭐가 달라지셨나요.

“밤에 잠이 오지 않아 뒤척였는데 교회에 갔다 온 뒤로 마음이 매주 편해졌어요. 예배가 끝나고 목사님이 기도를 해주시는데 가슴이 울렁거리고 뜨거워지더라고요. 제가 연극을 하면서 수많은 대본을 외웠잖아요. 앞으로는 성경을 외워볼 작정입니다. 신학도 공부하고 싶어요.”

-이승만 전 대통령이 ‘대한의 꽃’이라고 격려했다는 말이 사실인가요.

“저는 한국전쟁 당시 손원일 해군참모총장 요청으로 맥아더의 특사인 마이클 루시(한국 해군사령관)의 현지처가 됐어요. 1951년 8월 부산 피난시절 경남 진해 대통령 별장에서 손 제독, 루시와 함께 대통령을 만났어요. 그분은 저한테 ‘따로 훈장을 줄 순 없지만, 윤인자씨는 애국자입니다. 암, 우리 대한의 꽃이지’라고 말씀하셨어요.”

-루시가 대한민국 운명을 쥐고 있던 때였지요. 만감이 교차했겠습니다. 어떻게 루시를 알게 됐나요.

“부산 미군 장교클럽에서 우연히 루시를 만나 춤을 추고 난 뒤 사흘 만에 해군 헌병대가 들이닥쳤어요. 루시가 저를 찾는다는 거였어요. 중국집 2층 귀빈실엔 점잖고 신중해 보이는 손 제독이 앉아 계셨어요. 어려운 청을 드려 미안하지만 루시를 잘 달래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어요. 루시는 계급이 중령(나중에 대령으로 진급)이었지만 맥아더 장군의 오른팔이었지요. 손 제독은 루시가 마음이 언짢아 사인을 해주지 않으면 우리 대한민국이 큰일 난다고 했어요.

-돈도 원이 없을 정도로 많이 벌었다면서요.

“서울에서 들고 내려간 제니스 라디오 한 대가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죠. 40달러를 받고 팔아 그 돈으로 미군 PX 물건을 사서 120달러를 만들었죠. 그 종자돈이 급속히 불어나더니 금방 1000달러가 되고 끝내는 1만 달러를 넘었어요. 여자 대학생을 돕기도 하고, 기부단체에 뭉칫돈을 내놓기도 했어요.”

-손 제독 부인 홍인혜 권사와는 아주 절친한 사이였지요.

“그분은 해군 총수가 자신의 남편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검소하게 사셨어요. 늘 허름한 차림으로 고아원을 찾기도 하고, 전쟁미망인 자활기관을 찾아다녔어요. 저도 홍 권사님을 따라 나환자촌(한센병)에 봉사를 나가기도 했어요.”

-신상옥 감독에게 한 트럭분의 의상을 사 보냈다는 이야기는 뭔가요.

“이해랑씨가 어느 날 찾아와 아주 재주 있는 신인 감독 한 사람을 알려주더군요. 제작비 중 의상비가 모자라 난리라는 거예요. 얼마 후 신 감독이 찾아왔기에 약속대로 의상을 한 트럭 사 보내줬지요. ‘악야(惡夜)’란 영화인데 52년에 개봉됐죠. 그이의 처녀작이에요.”

-루시와는 어떻게 작별했나요.

“51년 12월 한국에서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보낸 뒤 본국으로 돌아갔어요. 루시가 탄 전용선이 부산항 제1부두를 떠날 때 해군 군악대가 홍 권사님이 작곡한 ‘해군가’를 연주했어요. 선상의 루시는 눈이 부신 듯 모자를 깊숙이 내려써 눈을 가리더군요. 부두에 서 있던 손 제독과 홍 권사도 손수건을 꺼냈어요.”

-‘운명의 손’으로 장안이 발칵 뒤집어졌다면서요.

“53년 부산 광복동의 한 교회에서 동료 배우 민구씨와 결혼식을 올리고 서울 상도동으로 올라왔어요. 그해 말부터 영화계에 발을 딛기 시작했지요. 이듬해 처음으로 찍은 영화 ‘운명의 손’이 데뷔작이죠. 방첩 장교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두는 역할이었어요. 요즘 같으면 말도 안 되는 7초간의 접문(接吻=키스) 행위인데 그때에는 온통 난리가 났었죠. 57년엔 ‘여자의 일생’에서 금봉 역으로 한국 최초의 알몸 목욕 장면을 찍었어요. 그 즈음 돈을 관리하던 사람이 일본으로 도망가는 바람에 알거지가 됐고 결혼 6년 만에 이혼까지 했어요. 65년엔 ‘빨간 마후라’로 제4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조연상을 받았죠.”

-그런저런 연단 끝에 76년 속리산으로 가셨군요.

“속리산 수정암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했어요. 2년 동안 염주를 붙들었지만 마음만 더 복잡해졌지요. 78년 다시 수유리로 돌아와 아카데미하우스 옆 골짜기 한쪽에 음식점을 개업했어요. 호사다마일까요. 늘그막에 허리 좀 펼까 했더니 그만 액운이 닥치고 말았어요. 말썽을 부리던 양아들이 그만 한밤중에 불을 질렀어요. 그나마 남아 있던 사진첩, 평생 즐겨 타던 가야금, 애써 모았던 서예품과 골동품도 모두 타버렸지요.”

-물벼락을 맞아 큰 고생도 하셨지요. 한 많은 수유리로 왜 또 오셨어요.

“99년인가엔 수도권 일대에 폭우가 쏟아졌지요. 저지대에 있던 그 철거민촌의 집이 완전히 물에 잠겨버렸죠. 또 한번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죠. 적십자에서 나눠주는 담요 한 장 달랑 들고 경기도 장흥으로 밀려갔어요. 지난해에야 수유리로 돌아왔어요. 예전 생각이 하도 많이 나기도 하고, 뭔지 모르지만 보이지 않는 손길이 저를 인도하는 것 같아요. 엊그제 밤엔 첫사랑도 만났어요. 참 기분이 좋았어요. 예수 제대로 믿어보려 합니다.”

■ 윤인자 연보

1923년 황해도 사리원 출생. 본명 윤인순

1935년 사리원 권번에 들어감

1942년 서울 국일관 기생

1943년 중국 하얼빈 태양악극단 입단

1945년 만주 봉천에서 해방 맞음

1947년 ‘홍도야 우지마라’ 주연

1950년 ‘황진이와 지족선사’ 부산 공연 중 한국전쟁 발발

1953년 민구와 결혼

1954년 ‘운명의 손’으로 영화 데뷔 최초의 키스신 촬영

1957년 ‘그 여자의 일생’에서 최초의 누드신 촬영

1958년 남편 민구와 이혼

1959년 가수 고운봉과 재혼

1964년 고운봉과 이혼

1965년 ‘빨간 마후라’로 제4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조연상 수상

1970년 ‘무장정 상경’ 등 출연

1976년 속리산으로 출가

1978년 환속

1984년 ‘바보사냥’

1989년 ‘아제아제 바라아제’ 등 출연

1990년 ‘수탉’으로 제26회 한국백상예술대상 특별상 수상

1991년 ‘변금련’ 출연

1993년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1999년 마지막 출연작 ‘얼굴’

2005년 여성영화인축제 공로상 수상

글 윤중식 기자·사진 김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