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5共은 무엇이었나] “아직도 고문당하는 악몽…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입력 2011-03-29 18:52


5共과 맞섰던 이들이 말하는 5共

1981년 3월 3일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그날, 장신환(당시 25세·현 원광대 교수)씨는 서울 남산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지하실에서 고문을 받고 있었다. 장 교수는 그날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학생들이 계속 끌려오고, 방마다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학생운동을 배후조종했다는 혐의로 영장도 없이 끌려가 한 달 넘게 고문을 당했다. 나중에 얘길 들으니 ‘각하’가 직접 대통령 취임식에 즈음해 학원가 소탕을 지시했다고 한다.”

민주화 운동 세력에 5공화국은 이렇게 고문과 비명으로 시작한 정권이었다.

부글부글 끓던 시대

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유신정권이 끝난 뒤 81년 5공이 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박석운 진보연대 공동대표는 이렇게 회상했다.

“사실 (박정희의 죽음은) 조금 빠른 듯했다. 민주화 운동 세력이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아니나 다를까. 12·12쿠데타가 일어났다.”

당시 서울대 학생운동 지휘부에 있었던 현무환(55·사회책임투자포럼 이사)씨는 “10·26으로 박정희는 죽었지만 유신체제는 무너지지 않았다고 판단했다”며 “80년 들어 부활한 학생회가 5월 대대적인 가두시위를 벌였지만, 시민들의 호응이 적은 것을 확인하고 신군부에 탄압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교내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른바 ‘5·15 서울역 회군’이다.

이틀 뒤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학생과 정치인 2699명을 체포했다. 그 다음날 광주에서는 계엄군과 시민이 충돌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다. 현 이사는 “군부는 이미 5월 초부터 병력을 이동하고 있었단 사실을 당시는 전혀 몰랐다”며 “결과적으로 광주 시민이 외롭게 싸운 것에 엄청난 아쉬움과 후회가 남는다”고 한탄했다.

박석운 대표는 5공을 이렇게 회상했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물밑에선 격렬하고 광범위한 저항이 전개됐다. 학생들이 한편으론 감옥으로 감옥으로, 또 한편에선 공장으로 공장으로 갔다. 내면에서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80년 고려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신계륜 전 의원은 공장행을 택했다. 그는 “수배를 받아 고향인 광주로 도피했다가 광주 항쟁을 두 눈으로 본 뒤 5공 정권과는 도저히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며 “82년 감옥에서 나온 뒤 일생을 노동운동에 바칠 각오를 하고 인천으로 갔다”고 말했다.

장신환 교수는 감옥에서 정권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잡혀오는 학생이 점점 늘어났다. 과거에는 서울대와 몇 개 대학 학생이었는데 점차 서울에 있는 타 대학, 지방대, 전문대 학생들로 다양해졌다. 아무리 눌러도 더 이상 누를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직감했다.”

고려대 84학번으로 전국대학생협의회 첫 의장을 지낸 이인영 민주당 최고위원은 “대중이 동참해야 역사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서 우리는 화염병과 쇠파이프 같이 국민 정서와 괴리된 과격한 투쟁 방식을 버리고 전투경찰에 맞고 끌려가는 완강한 저항 전략을 내세웠다”며 “그 과정에서 그동안 참고 있던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해 6월 항쟁으로 발전했다”고 설명했다.

서울대생 박종철씨 고문치사 사건 담당 검사로 고문 사실을 폭로한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 최고위원은 지난달 재출간한 저서 ‘박종철 열사와 6월 민주화 운동’에서 “노태우 민정당 대선 후보가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인다고 선언한 87년 6월 29일은 가슴이 벅차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썼다.

5공 청산, 아직 멀었다

5공이 무너진 뒤, 과거 청산 작업이 진행됐다. 전두환은 백담사로 갔고, 노태우와 함께 법정에 섰다.

95년 국회에서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4000억원을 폭로해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낸 박계동 전 국회사무총장은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야당 총재는 적당한 선에서 무마하려 했다”며 “결국 천문학적인 비자금에 분노한 국민의 여론을 이기지 못해 두 전직 대통령을 뇌물수수와 군사반란으로 기소했고 12·12에 대한 단죄가 이어져 당시 사법처리 된 장성의 별 숫자만 50개를 넘었다”고 말했다.

이제 5공이라는 나쁜 꿈에서 우리는 깨어난 것일까. 장신환 교수는 “아직”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 전날에도 안기부 지하실에서 고문 받는 꿈을 꾸다 옆에서 자는 아내의 눈을 눌렀다가 잠을 깼다고 했다. 30년이 지났지만 고통의 뿌리는 아직 남아 있었다. “잘못한 사람들이 그땐 내가 잘못했노라고 한마디만 한다면 풀릴 것 같다. 그걸 안 하고 끝까지 발뺌하는 모습이 답답하다. 역사와 사회에 억지와 거짓이 통하는 것 같다.”

현무환 이사는 다른 문제를 지적했다. 민주주의를 성취했다고 하는데, 계층 간 격차는 오히려 더 커졌다. 계층 상승 가능성은 적어지고, 대기업 독과점은 더 강해졌다.

“정치적 민주화는 이루었지만, 실질적인 면에서는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시민이 권력을 움직이고, 불공정한 경제 제도와 사회 제도를 감시하는 법과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기업도 독점적인 이익이 보장되던 시대의 패러다임에서 스스로 벗어나고…. 그렇게 광범위한 과거 청산이 이뤄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군사독재정권과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5공은 억압과 굴종의 시대였지만, 새 시대를 위한 운동장이 되었다”는 박석운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한 단계 더 극복해야 할 시점이 왔다. 군사정권 시절의 경제성장 전략, 토건주의 이런 부분이 이제 마지막에 이르렀다. 지금 사람들이 복지를 말하는 것도 바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다. 지금은 또 하나의 역사적 변환기다.”

현무환 이사는 청년 시절 미뤄두었던 꿈에 이제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독어독문과 77학번인데, 소설을 쓰려고 그 학과를 선택했다. 이제야 작품을 쓰려고 한다. 한국 민주주의 운동사를 소설로 풀 거다. 사람들이 그 시대를 생생하게 경험하고 분노도 감동도 느끼면서 역사의 뿌리를 알아주면 좋겠다.”

특별기획팀=정승훈 김지방 정동권 기자 s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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