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조미자] 어둠의 아이들
입력 2011-03-29 17:37
실로 삼십여 년 만에 야학을 같이 하던 김 선생님을 만났다. 그간 얼마나 변했는지, 뭘 하며 살았는지 차는 점점 식어가는데 이야기는 시간을 건너뛰며 달아올랐다. “밤마다 제물포역으로 가던 철길 생각나요?” 그의 물음에 나는 “애들 소식은 좀 들었나요?”하며 되물었다. 용현동 인하대 뒤에 성당이 있었다. 오래 전에 뜻있는 선배들은 은백양나무 자라는 그 곳에 중학과정 배움터를 마련했다. 원생들은 낮으로는 구두를 닦고 자장면을 배달했다. 수업 시작은 6시였지만 지각 체크를 하는 법은 없다. 수업 도중 어두운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만 들어도 힘이 솟았다. 나중에는 누구 발걸음인지 알아맞히게 되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기 전 우리는 인원정비를 해두어야 했다. 원생들은 대부분 수봉산 달동네에서 살았다. 산비탈을 오르자면 숨이 차고 블라우스가 등에 철썩 달라붙었다. 원생을 학원에 보내달라고 하면 문을 꽝 닫고 안에서 푸념이 흘러나왔다. “공부는 무슨 얼어죽을, 공부가 밥멕여주남?” 도로 내려올 수가 없었다. 부형이 재차 밖을 살피면 우리는 보내주십사고 부탁을 했다. 끈 떨어진 연처럼 우리를 떠나는 원생도 있었지만 며칠 못 가 성당 뜰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원생도 있었다.
그들이 치르는 검정고시에 영어와 수학은 늘 두통거리였다. 시험장을 서성이다 시험을 끝내고 나오는 그들의 표정을 재빨리 읽어야 했다. 머리를 긁고 나오면 실수했나 싶고 표정이 밝다 싶으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성적이 나오지 않을 때에는 오히려 패배감만 안겨준 게 아닌가 싶어 자책도 많이 했다. 가끔씩 직장을 잡은 선배들이 우리를 중국집으로 데려갔다. 메뉴는 흑백의 불문율이 지켜졌다. 자장 아니면 우동. 선배들의 주머니는 그날만큼은 당나귀 귀가 되어 홀랑 뒤집어진다. 그릇의 자장을 단무지로 훑는 후배들이 기특하고 안쓰러워 그들은 고량주를 시켜놓고 ‘두만강 푸른물에’를 불렀다.
나는 거의 시간표의 끝 시간을 차지했다. 동료들은 계단 나무의자에서 기다려 주었다. 제물포 역전까지 나가려면 밤도 이슥하고 길이 험해서였다. 철길의 침목을 밟으며 우리는 젊음을 이야기하고 그 시절의 고뇌를 털어놓으며 훈훈한 동지애를 키워나갔다. 어두운 길에 같은 방향으로 가는 동행이 있다는 것 이상 더 큰 의지는 없었다.
요즘 인천은 내가 대학을 다니던 때와 달리 몰라보게 변했다. 허허벌판은 아파트 숲을 이루고, 포구도 메워져 건설의 열기가 높아지고 있다. 지금쯤 그들은 어느 산업 현장에서 기름 묻은 손으로 나사를 조이고 있을까. 사회일각의 중견이 되었을 그들과 눈부시게 발전하는 인천은 함수 관계가 있을 것 같다. 이 도시의 주춧돌을 그들이 쌓아올린다고 생각하니 미더워진다.
지금 그 애들은 올망졸망 아이를 낳고 어미가 되어있겠지. 어디서 못다 배운 한(恨)을 풀고 있는지. 나는 나이도 잊어버리고 어제인 듯 원생 하나하나가 눈에 어른거렸다. 바람에 반짝이던 은백양나무 잎새들도 기억 속에 되살아왔다.
조미자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