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흥우] 어제와 오늘 말이 다르면

입력 2011-03-28 17:50


TV 예능프로그램이 이렇게까지 사회적 이슈가 됐던 적은 없었다. MBC 일요 프로그램 ‘서바이벌 나는 가수다’는 시청자들에게 한 약속을 파기해 지난 한 주 논란의 중심에 섰다. 유명 가수 7명이 노래 대결을 벌여 꼴찌가 탈락하는 서바이벌 형식의 이 프로그램은 독특한 포맷으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결과는 높은 시청률로 나타났다.

하지만 제작진이 원칙을 깨면서 시청자들의 깊은 관심은 한방에 무너졌다. 규정대로라면 탈락하는 게 당연한 꼴찌 가수에게 있지도 않은 재도전 기회를 부여하면서 프로그램 도입 취지를 스스로 부정한 때문이다. “애초 기획의도가 탈락이 아닌 경쟁을 통해 훌륭한 무대를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에 재도전 기회를 주는 게 맞다”는 제작진의 해명은 시청자들을 더 뿔나게 했다. 방송사의 대대적 홍보를 통해 프로그램 성격을 훤히 꿰뚫고 있던 시청자들을 바보로 본 모양이다.

MBC는 논란의 책임을 물어 담당 PD를 교체했다. 한 번의 예외는 두 번, 세 번의 예외로 이어질 수 있고 결국 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인 원칙을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담당 PD를 교체했다는 설명이다. 프로그램 자체는 실패했지만 ‘나는 가수다’는 시청자들에게 원칙 및 룰의 중요성과 사회적 약속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과학벨트)를 충청권에 유치하겠다고 공약했다. 과학벨트는 2015년까지 3조5000억원을 투입해 세계 최고 수준의 기초과학연구원과 중이온 가속기 등을 설치하는 대형 국책사업이다. 국토연구원은 과학비즈니스벨트가 조성되면 2029년까지 212조원의 생산효과와 136만명의 고용효과가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대선 공약사항으로 당연시되던 과학벨트 충청 유치는 세종시 수정안이 무산되면서 이상 조짐을 보이더니 급기야 이 대통령의 ‘원점 재검토’ 발언으로 불투명한 상황이 됐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신년 좌담회에서 충청권에서 표를 얻기 위해 한 공약이었고, 공약집에 실려 있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펴낸 공약집에는 과학벨트는 충청권에 조성한다고 분명하게 적시돼 있다.

충청권의 반발은 거세다. 이러한 상황을 충분히 예상했을 대통령이 무슨 의도와 목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선뜻 이해가 안 된다. 충청권이 과학벨트 입지로 부적합한 곳이라면 이 대통령의 말이 공감을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부 조사에서도 과학벨트 최적지로 선정된 곳은 충청권이다. 주무 부처인 교육과학기술부가 2009년 18개 도시를 대상으로 과학벨트 입지를 평가한 결과 천안이 1위, 천안과 인접한 아산이 2위, 대구가 3위를 차지했다.

과학벨트 입지는 올 상반기에 결정된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청와대 출입기자 간담회에서 “정치적 고려는 배제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납득하기 힘든 점은 정치적 고려를 하지 않겠다면서 대통령 스스로 한 공약과 정부의 사전조사 결과를 깡그리 무시하면서까지 원점에서 재검토하려는 이유다. 당초 약속을 지키지 못할 만큼 중대한 사정변경이 생긴 것도 아니다. 세종시 수정안 무산에 따른 화풀이 아니냐는 오해를 살 만도 하다.

우리는 이미 세종시 건설을 둘러싸고 극심한 갈등을 경험했다. 국론은 둘로 쪼개졌고 사회적 비용은 가늠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엄청났다. 그나마 세종시 건설은 전임 노무현 정부의 정책이어서 수정할 명분이라도 얻을 수 있었지만 현 정부의 공약인 과학벨트 충청 유치를 번복하려는 시도는 명분도 약하고, 실익도 없다.

‘나는 가수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것은 스스로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어제 말과 오늘 말이 다르면 대통령은 권위를 잃고 정부 정책의 신뢰도는 떨어진다. 다음 달 과학벨트 추진위원회가 발족한다. 위원회의 입지 결정이 또 다른 사회적 갈등의 불씨가 되지 않기를 기대한다.

이흥우 선임기자 h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