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은 어떻게 國文이 되었을까… ‘조선언문실록’
입력 2011-03-28 17:35
훈민정음이란 이름이 버젓이 있음에도 조선시대에 광범위하게 통용된 한글의 이름은 언문(諺文)이었다. 중국의 글자를 문자(文字)라 부르던 것과 비교하면 오늘날의 시각에서 언짢은 말이다. 그러나 저자들은 굳이 ‘한글실록’이 아닌 ‘조선언문실록’(고즈윈)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백성들의 말이었고 여성들의 말이었던 한글의 실체가 옛날의 용어 속에 드러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훈민정음 반포 초기 최대의 난관은 유학자들의 뻣뻣한 태도였다. 최만리가 “어찌 스스로 이적(夷狄)이 되려 하는가”라며 훈민정음 반포에 반대했음은 널리 알려진 일. 문종이 즉위한 후에도 사대부들은 언문 서적 간행기관인 정음청을 혁파하라는 상소를 끊임없이 올려댔다. 왕자들이 정음청에서 불교 서적을 간행하는 일을 막기 위함이었다. 문종의 환관 중용을 막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정음청은 결국 단종 즉위년(1453)에 폐지됐다.
저자들은 언문의 보급이 정치·사회적으로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잘못된 정치나 부패한 관료들에 대한 투서가 잇따르고, 불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언문으로 연애편지를 썼다가 화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투서에 분개한 연산군이 언문 사용을 금지시킨 적도 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언문은 구한말 정식으로 ‘국문(國文)’으로 인정받기 전부터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역설적으로 언문이 ‘여인들과 백성들의 글’로 굳어졌기 때문이라는 게 저자들의 분석이다. 왕이건 사대부이건 여인과 소통하고자 하는 남자들은 언문을 써야만 했다는 것. 한문을 읽고 쓸 줄 아는 왕비나 대비라도 교지를 내릴 땐 언문으로 했다. 백성들을 상대로 방을 붙일 때도 언문이 유용하게 사용됐음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언문이 정착된 후 조선의 ‘문맹률’은 어느 정도였을까. 정확한 수치를 아는 건 불가능하지만 몇 가지 단서는 있다. 구한말 한국에 왔던 캐나다인 선교사 제임스 스카스 게일은 ‘전환기의 조선’이란 저서에서 “중국이나 인도에서는 천 명 가운데 한 명이 읽을 수 있는 데 비하여 조선에서의 읽기는 거의 보편적이다”라고 밝혔고, 이사벨라 비숍도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란 책에서 “마을마다 서당이 있고, 읽고 쓰지 못하는 조선인을 만나는 일이 드물었다”고 말한 러시아 장교의 이야기를 적고 있다. 저자들은 이런 기록들을 토대로 개화기 조선 백성들이 대부분 글을 알고 있었다고 추측한다.
이 책은 언문과 관련한 여러 가지 비화들이 실려 있어 대중이 읽기에 어렵지 않다. 임진왜란 때 언문을 비밀문으로 사용했던 일, 중국인에게 언문을 가르쳐 주었다가 기밀 누설의 혐의를 받은 문관 주양우 사건 등이 흥미롭다. 창제된 지 568년이 된 한글의 정사와 야사가 모두 궁금한 이에게 권할 만하다.
양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