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인문 (7) 연예인선교단 만들어 군 선교 앞장
입력 2011-03-28 17:47
담배와 술을 유난히 즐겼던 나였다. 오죽했으면 2005년 처음 뇌경색으로 쓰러지고도 몸이 조금 회복되자마자 바로 담배를 찾았을까. 아내는 건강이 염려된다며 담배라도 끊으라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이것들 때문에 나는 넘어지고 깨지고 말았다.
배우가 되고 싶어 무작정 상경, 오랜 기다림 끝에 배우가 됐고, 그야말로 화려하게 1970년대를 보냈다. 그런데 인간이기에 너무 자만했던 것일까. 80년 어느 날, 무면허에 음주운전으로 큰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어쩌면 연기 인생이 끝날지도 모르는 그런 순간이었다. 몸을 회복하는 것보다도 이것 때문에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때 나를 잡아준 이가 지금은 고인이 된 문오장 목사다. 그는 당시 주변 연예인들을 전도하는 데 참 열심이었다. 후에는 탤런트로서 목사안수까지 받고 군 선교, 연예인 선교에 앞장섰다. 낙담해 있던 나의 손을 꼭 잡고 “교회에 가자”고 이끌었다. 솔직히 그때는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 듯, 아내와 아이들까지 데리고 문 목사를 따라 여의도순복음교회 문턱을 처음 넘었다. 이곳은 영원한 내 마음의 안식처나 마찬가지다.
고(故) 최자실 목사님과 조용기 원로목사님도 직접 만나 인사드렸다. 매주일 듣는 그분들의 말씀은 자양분이었다. 한번은 최 목사님이 나와 문 목사를 불렀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을 향해 “서민의 삶을 대변해주는 타고난 배우”라고 격려해주셨다. 그날 목
사님은 다음의 이야기를 하시려고 우리를 부른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달란트로 복음을 전하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나는 두 사람이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되길 바라요.”
결코 사양할 수 없는 목사님의 권면이었다. 어쩌면 문 목사는 이 말씀 때문에 배우를 포기하고 목회자의 길을 택했는지 모른다. 그럼 나는 어떠한가. 그때는 무조건 따르겠다고 약속했다. 믿음보다는 막연히 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그렇게 순종했는지 모른다. 나는 최 목사님을 영적인 어머니로 생각했고, 목사님 역시 나를 아들처럼 챙겨주셨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내 삶엔 수차례 우여곡절이 생겼다. 쉽게 말해, 배우로서 잘 나갈 땐 예수님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시련이 닥치면 다시 주님을 찾았다. 그런 삶이 반복될 때마다 최 목사님의 말씀이 귓전을 때렸지만, 늘 고개를 흔들고 잊어버렸다. 결국 나는 ‘돌아온 탕자’였다. 지금은 이렇게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았으니 말이다.
문 목사와 나는 연예인선교단을 조직했다. 어떻게 하나님께선 그렇게 멋진 믿음의 파트너들을 만나게 해주셨는지. 신소걸 고운봉 문혜원씨 등이 우리와 함께했다. 최 목사님이 부르면 어디든 달려갔다. 특히 군 선교에 앞장섰다. 최 목사님은 이렇게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연예인 용사들을 불러 “너희들의 믿음이 비둘기 같다”고 아낌없이 칭찬해주셨다.
82년엔 최 목사님의 삶을 다룬 영화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에도 출연했다. 잠시 사고 후유증이 있긴 했지만, 80년대 나는 누구보다 바쁘게 보냈다. 해마다 서너 편, 많게는 예닐곱 편의 영화와 드라마를 찍었다. 이렇게 점차 일이 많아지자 주일성수를 제대로 못했다. 선교활동에도 빠지는 횟수가 많아졌다. 급기야 89년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최 목사님이 돌아가시자 나의 신앙은 뿌리째 흔들렸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