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수의 영혼의 약국(94)

입력 2011-03-28 10:34

어느 철학자의 공중그네

나는 신학교 1학년 때 그 책을 읽었습니다. ‘현대 신서’라는 포켓판이었는데, 아직은 어리어리하여 신학사상이라는 것이 생기기도 이전입니다. 그러니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명확하게 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학이 이만하다면 즐겁겠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아직도 이성의 기억장치에 그 때 그 책과 저자의 이름이 또렷하게 남아 있는 이유도 그래서일 것입니다. 그 책이 바로 ‘춤추는 신’이고, 저자는 하버드 대학의 신학교 교수였던 샘 킨이라는 분이었습니다. 그 이후 샤르뎅, 존 캅, 화이트 헤드 같은 이들의 번역된 책들을 배고픈 사람처럼 찾아 읽었습니다. 샘 킨에게 있어서 춤추는 신이란, 박제되고 조직화되어 종교의 상징이 된 신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 속에서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그런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조차 어디론가 방향성을 갖고 움직여가는 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몇 십 년이 흐른 어느 날, 나는 또 한 번, 그 때 그 사람 샘 킨을 통해 놀라움과 감동을 받게 됩니다. 정확하게는 그가 쓴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신학 교수이던 그가 교수 자리를 내팽개치고 공중그네를 타보려는 마음을 갖습니다. 예순두 살이 되던 때 그는 그의 학문에서는 더 이상 자유를 얻을 수 없다는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공중그네를 타면서 알게 된 깨달음의 진실 세계를 ‘공중을 나는 철학자’라는 책을 통해 펼쳐 놓습니다. 그 책의 112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동작을 취하는 순간에 잘못해서 등으로 떨어지지 못하면, 화살이 빗나가거나 녹차를 쏟을 염려는 없지만 부상을 입게 된다. 티토 가오나의 몸 동작을 연구한다면 헤밍웨이가 위대한 투우사를 ‘중압감 속에서도 우아하다’고 묘사한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떨어지는 기술을 익히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수도승의 수행이라기보다는 세속에서 하는 훈련이다. 공중에 있을 때나, 중년이 될 때, 우리는 종종 어쩔 수 없이 변화해야 한다. 묘기에 실패하고, 해고당하고, 이혼하고, 병에 걸리고, 좌절할 때 우리는 과거의 습관에 따라 그대로 행동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변화하기 어렵다. 떨어지는 동안 몸을 돌리는 기술을 익히지 못한다면, 습관에 의해 매번 똑같이 정해진 곳으로 끌려갈 것이다.”

수평적인 삶에서 수직적인 삶으로 나아가는 아찔한 통과의례를 거친 후 우리는 샤부루베시에 (1460m) 도착했습니다. 봄볕이 산의 아랫도리에 뿌려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도 살고 있었습니다. ‘살고’ 있다기보다는 그저 ‘있다’는 말이 맞을 겁니다. 얼굴과 마음이 나누어지지 않은, 산처럼 묵묵하게 느껴지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움직임은 마치 산의 혼령들처럼 느껴졌습니다. 아이도, 어른도, 짐승도 모두 산의 혼령 같았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아무도 그들에게 말 걸지 않았고, 누구도 우리에게 말 걸어오지 않았습니다. 오다가다 바람소리처럼 어디선가 ‘나마스데’하는 소리가 돋았다간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랑탕 계곡을 왼쪽에 끼었을 때 모두들 허리춤을 밭게 잡았습니다. 눈앞에 높이 7000m의 설산이 우리를 내려다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히말라야’니까, 세계인 누구나 아는 유명한 산이니까, 많은 사람이 웅성거리며 오르내릴 거란 짐작도 맞지 않았습니다. 우리 일행 외에는 아무도 산으로 들어가는 이가 없었습니다. 앞선 이의 등에 얹힌 배낭에는 비장한 침묵 같은 게 도사리고 있었는데, 총 길이 2,400km의 히말라야가 고작 1미터 몇 센티미터의 길이를 가진 존재를 압도하고 있어서였을까요? 히말라야는 고대 산스크리트어입니다. 범어(梵語)로 ‘눈(雪)’을 뜻하는 ‘히마(hima)’와 ‘거처’를 뜻하는 ‘알라야(alaya)’가 어울린 말이랍니다. 히말라야에서 사람은 주체가 아닙니다. 돌이나 나무처럼 그저 ‘있는 존재’입니다. 이곳의 주체는 ‘눈’입니다. 눈이 하늘이 되고, 눈이 바람이 되고, 눈이 산이 되고, 눈이 생명이 되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무의식 가운데 압도된 이성들이 산의 들머리에서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지요.

2,400km의 히말라야 자락에 이제 막 발을 들여놓던 내가 샘 킨을 떠올린 것은 무슨 이상증세였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직으로 서 있는 길을 들어서는 순간, 공중그네가 하늘로 높이 솟구쳤다가 밑으로 하강하는 아찔한 장면이 현기증처럼 스치듯 일어났습니다. 왜 그 순간에 ‘오르는 힘보단 떨어지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던 말이 생각났는지는 아직도 모릅니다. 그렇게 떨어지는 기술을 익히기 위해 우리는 하늘로, 눈들이 거처하는 도시를 향해 기어 올라갔습니다. 도멘(1672)에서 네팔 막걸리로 목을 축인 일행은 어둑어둑해지는 밤부(2030)까지 기어 올라갔습니다. 히말라야를 가는 발은 자동식이 아니라 수동식입니다. 무의식으로 내딛는 발이 아니라 자의식으로 내디뎌야 하기 때문입니다. 발을 내딛는 매 순간은 ‘잘 떨어지기 위한 수련’입니다. 히말라야는 이렇게 ‘중압감 속에서도 우아한’ 영혼의 수련장인 게 틀림없습니다.

"너희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막10:44)

허태수 목사(춘천 성암감리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