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 논설위원, 대지진 직후 도쿄를 가다(3)

입력 2011-03-28 10:18


동일본 대지진의 후폭풍이 원자력발전소 문제로 비화되고 있다. 지진과 쓰나미 피해는 일본 경찰청 발표로 3월 25일 현재 실종자가 1만7443명(사망자까지 포함하면 약 2만7500명)에 이를 정도로 복구는커녕 아직 인명 손실 부분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사태는 그보다 더 긴급하게 후쿠시마 제1원전 방사성 물질 누출, 이른바 방사능 오염 사태에 대한 두려움이 확산되고 있다. 이는 후쿠시마 원전에서 260㎞ 떨어진 도쿄는 물론 일본산 해산물과 농산물을 접하는 한국을 비롯한 인접국들까지 예외가 아니다.

도쿄의 원전 반대 대모
일본은 현재 후쿠시마 원전을 포함해 55기의 원전을 가동하고 있으며 11기가 건설 중이거나 계획 중에 있을 정도로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원전 대국이다. 전체 전력공급량 가운데 원전이 차지하는 비율인 원전의존율이 30%에 이르면서도 원전에 대한 안전성을 국내외에 자랑해왔다. 그런데 이번 지진과 쓰나미로 일본 원전의 안전성이 도마에 올랐다. 결과만 놓고 보면 일본 원전의 안전성은 신화에 지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이 때문에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 독일 등에서 원전 반대운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원전 반대 움직임은 일본 내부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은 지진 발생 7일째인 지난 3월 17일 도쿄 시부야(澁谷)에서 ‘원전 즉시 정지, 지진 피해로 인한 해고 반대, 간(菅) 총리 퇴진’ 등의 슬로건을 내걸고 360여명(주최 측 주장)이 모여 대모행진을 벌인 데 이어, 20일에는 도쿄 요요기공원 야외음악당과 시부야 가두에서 ‘원전 반대, 반전’을 주장하는 이른바 반전대모를 꾀했다. 집회 기조연설에서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 오다 요스케(織田陽介) 위원장은 “일본인들은 이번 지진·쓰나미 피해에 대해 슬퍼하기보다 분노해야 한다”고 말했다. 14m의 거대한 쓰나미가 밀려왔는데 고작 5m의 방파제를 세워 막으려 했던 일본 정부의 불충분한 대비, 다른 무엇보다 안전하다던 원전이 실제론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번에 명백히 확인됐다는 점 등을 그는 지적했다.

차세대 에너지원(源)
아직 진행 중인 사안에 대해 문제의 원인을 짚어 보고 여파를 따져보는 것은 조금 성급할지 모른다. 하지만 3만 명에 가까운 사망·실종자가 발생하고 대략 수십조엔의 재산피해가 예상되는 동일본 대지진은 이제 원전 문제까지 또 하나의 과제를 떠안게 됐다.

17일 도쿄의 의원회관에서 만난 스도 노무히코(首藤信彦) 중의원 의원은 그간의 일본의 재해대책이 안이했음이 이번에 확인됐고 이번 기회에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관련 인터뷰 기사는 국민일보 3월 18일자 4면 참조). 스도 의원은 원전 자체의 존폐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으나 원전 중심의 에너지공급체계에 대한 재검토는 물론 기존 원전의 안전성 확보 등이 당장의 과제라고 지적했다. 일본의 높은 원전의존율, 특히 도쿄전력의 원전의존율은 50%에 이르고 있어 후쿠시마 원전 사태는 가볍게 봐선 안 될 것이라고 했다.

같은 지적은 이번 대재앙 이후 일본경제 동향과 한국을 비롯한 세계경제로의 여파 등을 주제로 18일 도쿄에서 인터뷰했던 이와타 가즈마사(岩田一政) 일본경제연구센터 이사장(전 일본은행 부총재, 전 도쿄대학 교수)에게서도 터져나왔다(관련 인터뷰 기사는 국민일보 3월 19일자 8면 참조). 이와타 이사장은 이번 재해의 직접적인 재산피해가 1995년 코베 대지진 때의 배에 이르는 20조엔 이상일 것으로 예측했다.



선진국의 경우 보통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손실된 사회 인프라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신규투자가 일어나 경제적인 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 일본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고 이와타 이사장은 말한다. 원전 사태로 인해 빚어진 당장의 전력공급 애로 해소 등 당장의 사태 수습도 만만치 않지만, 중장기적으로 원전을 중심으로 하는 에너지 공급체계에 대한 본질적인 재검토가 요청되기 때문에 사태 수습 이후의 후폭풍에 대한 대응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것이다.

원전 문제는 한국의 35.5%에 이르는 높은 원전의존율을 생각할 때 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이 일본에 비해 지진에서는 좀 더 안전하다고는 하지만 그 누구도 자연의 움직임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고 보면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원전의 안전성 문제, 차기 에너지원에 대한 논의는 우리에게도 같은 무게감으로 다가오고 있다.

리더십, 리더십 그리고 리더십
중요한 것은 리더십이다. 새로운 에너지원에 대한 문제는 정치적 리더십 문제와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번 지진을 겪으면서 일본사회의 리더십에 대한 불만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온다. 이미 지진 발생 초기, 후쿠시마 원전을 돌아보고 온 간 나오토(菅直人)는 “원전은 아무 탈이 없으니 안심해도 된다”고 국민에게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원자로의 격납건물 지붕이 폭발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총리의 스타일이 구겨진 것은 물론 리더십의 실종이란 말이 나오기도 했다.

지난 24일 서울에서 만난 가와무라 가즈노리(河村和德) 도호쿠(東北)대학 교수는 지진 당시 센다이에 있는 자신의 대학 연구실에 있었던 만큼 현지 사정에 대해 정통했다. 그는 이번 지진 이후 피해복구가 늦어진 데 대해 현지 기초자치단체의 공공기능 상실을 가장 먼저 꼽았다. 지진·쓰나미 피해를 해당 지역 주민뿐 아니라 기초자치단체 공무원도 함께 입었기 때문에 현장에서는 리더십이 사실상 작동되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개개인들이 침착하게 행동해주어 그나마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을 뿐 지원물품의 전달체계, 관리 등에서 애로가 발생하면서 이재민들의 어려움이 더욱 컸다는 것이다. 리더십 문제는 비단 중앙정치 무대만의 화젯거리가 아닌 셈이다.

아와타 이사장에 따르면 재해복구재원으로 당장 5조엔이 필요하지만 GDP 대비 200%가 넘는 일본의 국가부채율을 감안할 때 국채발행이 과연 타당할 것인지, 아니면 기존 예산을 재편성해서 지출의 우선순위를 바꿀 것인지 하는 것은 순전히 정치적 리더십과 관계된 문제이다. 정책은 전문가로부터 나올 수 있으나 이를 법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국회, 즉 정치가의 몫이다. 그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 정치가가 국민을 설득하는 일이다. 정치가의 리더십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여 국민을 충분히 설득할 수 없다면 아무리 좋은 정책아이디어가 있어도 그것은 실행될 수 없는 그림의 떡이 될 뿐이다.

단기적으로는 복구예산의 염출 내지 조정, 중장기적으로 에너지공급체계에 대한 본질적인 재검토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리더십이 그 어느 때보다 요청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은 지금 거대한 자연재해와 더불어 정치적인 격변기를 맞닥트리고 있다고 하겠다. 이 역시 이웃나라 얘기만은 아닌 것같다.

도쿄=글·사진 국민일보 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